필리핀 보홀에 다녀왔다. 국제합창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노래하고 있는 합창단은 지난 몇 년간 국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덕분에 이번에는 국제합창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국제합창대회는 두 번째로 참가했다. 2002년 부산에서 열린 국제합창대회에 참여했을 때에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합창을 처음 시작했던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2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합창을 하고 있을 줄 그때에는 몰랐다.
합창의 시작은 초등학교 3학년에 들어간 어린이 합창단이었다. 교회 언니가 하는 것을 보고 엄마를 졸라 합창단에 들어갔다. 노래가 좋아 성악가가 되고 싶다는 나에게 엄마는 노래는 취미로 하라며 공부를 하라고 했다. 엄마가 생각하기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는 게 우선이었다. 사실 당시에 엄마의 말이 다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나도 공부하는 게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마 엄마도 내가 이렇게 끈질기게 합창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어릴 적부터 워낙 호기심도 많았고, 또 그만큼 싫증도 잘 내는 아이였으니 말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합창을 그만두었다. 피아노 학원도 끊은 참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안 되지만, 그때에는 뭐랄까 중학교는 초등학교와는 다르게 설렁설렁 학교를 다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학교는 더 멀어졌고, 수업 시간도 길어졌다. 나와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언니가 교복을 입고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서서 나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 같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정말이지 학교를 다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침 8시 30분까지 등교해서 수업을 듣고,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학에 가면 꼭 다시 합창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사실 왜 그렇게 노래가 하고 싶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딱히 답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냥 노래하는 게 즐거웠다. 무언가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좋았고, 내가 무언가 역할을 맡아서 멋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좋았다. 여러 사람의 소리가 모이면 혼자서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다채로움과 웅장함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파트와 화음을 맞추고, 또 박자나 음정이 맞아떨어지거나 아니면 미묘하게 부딪히는 요소를 발견하는 일이 재미있었고, 악보에 적힌 음표와 악상을 현실로 옮기는 일도 재미있었다. 그런 순간순간의 즐거움 때문에 계속해서 합창할 기회를 찾았던 것 같다.
대학에 가서는 교환학생을 다니느라 자주 거처를 옮겨 다녔다. 한 번은 호주로, 한 번은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그런 와중에도 합창을 할 기회를 계속 엿보았다. 덕분에 스위스에서 합창단에서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는 합창단이었는데, 지역 합창단에서 노래한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 번은 13세기에 지어진 성당에 가서 공연을 했다.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건물이 남아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렇게 오래된 건물이 아직까지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도 무척이나 신기했다. 우리나라는 나무로 건물을 지어서 그런지 아니면 전쟁을 겪으며 소실이 많이 되어서 그런지, 오래된 건축물은 문화재로 지정하고 상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보호하는데 말이다.
또 하루는 나와 가깝게 지내던 합창단원이 자기네 전통을 사랑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에게 멘델스존, 드로르 작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네 전통 음악이었다. 우리나라로 따진다면 사물놀이를 체험하는 외국인, 판소리 하는 외국인을 보는 느낌이었을까? 과거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 열강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며 자라난 내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한국의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의 느낌과는 또 다르겠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스위스에서의 경험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국제합창대회에 참가했던 덕분에 많은 외국인을 실제로 만나볼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 덕분일까, 한국 밖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세계에도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외국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어를 잘하면 더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더 넓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깨우쳤다.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뜬 덕분에 교환학기도 다녀올 수 있었고, 언어에 관심을 가진 덕분에 영어로 쓰인 책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기도 했다.
특별한 경험까지는 아니지만 지금 속한 합창단에서 겪는 일들에서 글의 소재를 발견하기도 한다. 지금 노래하는 합창단은 여성합창단으로, 단원들의 나이는 나보다는 나의 엄마와 더 가깝다. 연습 시간은 평일 오전이다. 직장에 다닌다면 지키기 어려운 연습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경우 가정주부이고, 한 번도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도 많다.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시대도, 겪어온 사회적인 역할도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참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생겨났다.
머리는 왜 안 기르니, 화장은 안하니와 같은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 없는 단원은 ‘이런 걸 묻는 게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이라며 결혼은 언제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에서 내가 전공한 물리학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을 발견하면, 내가 전공한 물리학의 개념을 친근하고 쉽게 풀어내는 글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얼핏 생각하면 물리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뭐든지 오래 하다 보면 머릿속에서 연관을 짓게 되는 듯하다.
노래가 좋아서 합창을 했지만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하고, 내 세계가 확장되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데에 계속해서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다. 노래하는 즐거움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합창을 하지는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합창이 있었기에 내 삶이 이토록 풍요로워졌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기에는 합창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함께해야 하므로 자연스레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어쩌면 당연한 이유가 깔려있기도 하다. 여러 사람이 모이기에, 또 나와는 다른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나의 세계가 확장될 수 있었고, 새로운 기회와도 연결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대학원을 다니며 학교 동아리에서 합창을 할 때에는 나보다 나이가 적은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학부생일 때와는 무엇이 다른지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조교를 맡았던 학생과 함께 노래하기도 했다. 조교가 끝나면 으레 또 만날 일이 없기 마련이지만, 합창단에서 함께 노래하며 또 합창단 공연을 보러 온 학생들과도 계속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한때는 마땅히 노래할 곳을 찾지 못해 어쩌다가 서울의 외국인들이 모인 합창단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정작 나조차도 관심이 없고 잘 모르고 있던 국내의 탈북민에 관심을 가진 사람과 관련 단체를 알게 되었고, 또 해당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 단원은 나에게 자녀의 과외를 부탁하기도 해서,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외국인 고등학생을 과외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내가 꾸준히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물리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중간에 변리사 시험 준비를 했다가 그만두고,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책을 한 권 번역하더니, 갑자기 또 물리학을 쉽게 풀어서 쓰는 글을 쓰고 있다. 취미도 마찬가지이다. 피아노는 어릴 때 잠깐 하고 말았고, 스포츠댄스도 추다 말았고, 그림도 그리다 말았고, 요가도 하다가 말았다. 합창도 그중에 하나였지만, 어찌어찌 간헐적으로 이어지다 보니 어느덧 23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취미가 되어버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합창을 그만두었다기보다는, 마땅히 노래할 곳을 찾지 못해 합창을 쉬었다고 하는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합창을 하지 않을 때에도 노래할 곳이 없나 계속해서 두리번거렸기 때문이다.
23년 전에 참가한 국제합창대회에서는 모든 게 새로워 보였지만, 23년이 지나 참가한 국제합창대회에서는 다른 합창단을 보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합창대회에 참가한 합창단은 연령대가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다양했다. 이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싶었고, 지나간 과거가 아쉬웠다. 나에게는 지나간 과거가 저들에게는 반짝이는 현재라는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그런 그들이 그 자체로도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의 나도 먼 미래에 돌아보면 반짝이는 현재가 되리라 생각하며,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노래하는 즐거움을 계속해서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노래하는 합창단에서 얼마나 노래할 수 있을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 초반에 평일 오전의 연습시간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일정에 큰 변화가 생기더라도,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또 노래할 수 있는 곳을 찾으리라 생각해 본다. 교환학생을 가서도 노래할 곳을 찾고, 한국에서도 어쩌다 보니 외국인들이 모인 합창단에까지 흘러들어 갔듯이 말이다. 찾다 보면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노래하고 먼 미래에 할머니가 되어서도 노래하며 나이가 들수록 더 멋있게 노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