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내 제1고향은 중국, 제2 고향은 한국

by 김경화

'고향'이라는 말은 참 정겹고 편안하다. 나에게는 2개의 고향이 있다. 첫 번째 나의 고향은 내 삶에 별 의미를 주지 못했다. 나는 그 고향에서 철없던 날들을 보내면서 삶의 의미를 모르고 지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고향을 떠나고 싶었다.


나의 고향은 중국 연변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나를 냉혈 동물이라 할 지도 모른다. 어찌 고향에 대해 이렇게 말하느냐? 고 할 것이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어릴 적 90년대 초반, 중국에 개혁개방과 더불어 한국 붐이 일었고 사람들은 한국에 돈벌이를 떠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한국, 일본, 사이판, 미국등 외국으로 혹은 큰 도시로 나가기 시작했다. 동네에도 10대 후반의 고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언니, 오빠들은 거의 다 떠났다. 마을에 남은 젊은이들은 학생들뿐이었고, 40대부터는 어른측에 속했다. 일거리도 없고 공장도 없었다. 남녀 모두 동네어귀에 앉아서 놀았고, 농사 짓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빚을내서라도 외국에 가서 목돈을 벌려고 했다. 돈 없는 사람들은 마을에 남아 삼삼오오 모여 살면서, 학생들이 하교할 시간이 되면 꼴 보기 싫을 정도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그런 모습이 보기 싫었다.

40대 중후반 되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일찍 큰 도시나 한국회사에 가서 돈을 벌어 보내주는 덕분에 놀고먹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여자아이들은 그저 한국에 시집만 잘 가면 되었고, 남자아이들은 한국에서 노가다로 몇 년 고생하거나 중국 내 한국회사에서 일해 돈을 버는 것이 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 전체에 꿈이라 할만한 분위기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최남단 광둥성의 한국회사 공장에서 통역 겸 자재관리 일을 했다. 한국회사에서 일하면 기본적으로 월급이 조금 높았다. 조선족이기에 한국어와 중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서, 고졸이라도 중국인들보다는 높은 월급을 받았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떠돌이 신세로 다니다가 결혼 적령기가 되어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으로 시집왔다.


꿈 없이 살아왔던 세월 때문에 한국의 시집살이에 적응할 수 없었다. 생활 능력도 안 되고 살림살이도 서툴렀으며, 모든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살아가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배로 어려웠고, 한국의 삶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삶은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남편 탓인 것 같았고, 포기하려고 까지 했다. 그순간 어린자녀들을 바라보면서 또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포기할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나를 돕지 않으면 누가 나를 도우랴?‘ 스스로 일어서야 했고 포기할수 없기에 다시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아픔의 세월을 견뎌내고 지난날의 꿈 없이 살았던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에게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신차리고 자신에게로 돌아가니, 결국 자신을 찾게되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이라는 나라는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다.


수많은 이주민과 이웃 나라에 희망과 꿈을 주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나는 한국에 와서 내가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워졌다. 내 마음속에는 이제 뜨거운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제는 나도 당당하게 말할수 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나에게 꿈을 주고 삶을 주는 한국이 나의 고향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 자녀, 내 남편, 나의 삶과 꿈이 여기에 있는데 여기가 나의 고향이 아니고 어디가 나의 고향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