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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차 Sep 14. 2022

물고기들에게 말을 걸고 고무나무에게 물을 주는 하루

 몇 주 전 일요일,  여느 때처럼 친정부모님 댁에 들렀다.  나른한 오후 시간이라 아버지는 창가 옆 1인 소파에 깊숙이 앉아 티브이를 보고 계셨고 나도 별생각 없이 그 옆 소파에 앉아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아버지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화분과 그 속에 하릴없이 서있는 말라비틀어진 죽은 나무가 보였다.


'아... 드디어 죽었구나'


아버지가 30년 넘게 키워오신 벤자민 나무였다. 부모님이 이사를 다니실 때마다 바뀌는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건강을 유지했고 심지어 천장까지 뻗어올라 아버지가 종종 가지치기를 해주셨을 정도로 크기가 큰 나무였다. 대부분의 비극이 그렇듯 이 일도 시작은 매우 사소했다. 몇 달 전 아버지는 나무의 크기에 비해 화분이 작은 것 같다며 방문 분갈이 회사에 연락을 하여 커다란 화분과 좋은 흙으로 집을 바꿔주셨다. 그러나 그날부터 아버지의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시들해졌고 결국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버렸다. 사진으로 나무의 상황을 연락받은 분갈이 업체는 와서 봐준다 답만 하고 결국은 오지 않았는데 그땐 아무래도 이미 늦었기 때문이리라. 말씀이 없으시고 내성적인 아버지는 웬만해서는 본인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벤자민의 죽음에 상심이 크셨는지 갈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셨다. 어떤 날은 화분과 흙이 아까우니 나보고 가져가라셨다가, 또 어떤 날은 죽은 가지에 조화 바구니를 몇 개 걸어두니  그나마 덜 휑해 보이지 않냐고 내게 물어보셨다. 친정부모님 집 가까이에 사는 언니도 아버지의 상실감을 눈치챘는지 어느 날 자매들에게 부모님께 물고기를 깜짝 선물로 사다 드리면 어떨 것 같냐고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물고기들이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만장일치로 동의해주었다.


얼마 후 부모님의 집에 갔을 때 새로 온 식구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때가 되면 나무에 물을 주고 색이 변해버린 잎들을 정리해주는 대신 이제 아버지는 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런데 하루에 한 번 참깨보다 조금 큰 먹이 열 알을 그 아이들에게 주고 한 달에 한번 어항의 물을 갈아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허한 마음이 채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활발하게 움직이며 주둥이를 뻐끔거리는 귀여운 물고기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피하고 싶은 질문들이 내 머릿속에 다시 나타났다.


이 물고기들은 얼마나 오래 아버지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엄마와 아버지는 얼마나 오래 우리 곁에 계실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아이들 곁에 있어 줄 수 있을까.....


부모님 집에 있는 죽은 벤자민 나무와 그 옆 어항 안에서 마치 춤을 추며 돌아다니듯 움직이는 물고기들을 보고 집에 온 날, 나는 화분들이 있는 거실 한편으로 가보았다. 화초를 기르는 데 별 소질이 없는 나와 살면서도 너무나 기특하게 잘 자라 주는 나의 몇 안 되는 화분들 중에 그 화분이 보였다. 수년 전 직장 때문에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왔을 때 먼저 이사와 있던 선배가 환영의 선물로 준 고무나무였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나보고 화초를 잘 키우냐고 물었고 나는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바로 며칠 뒤에 그녀는 작은 화분 한 개를 주면서 이 아이는 너 같은 사람도 아주 잘 키울 수 있고 절대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키워보라고 했다. 우리 집에 오면 분명 죽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안 받을 수는 없기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받아왔다. 누가 알았을까. 그 당시에는 기껏해야 50 센 미터 정도였던 그 고무나무는 그동안 큰 화분으로 두 번이나 이사를 했고 이제는 어린아이 키만큼 자랐다.


 그녀가 준 고무나무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무탈하게 잘 지냈지만 정작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선배는 작년 여름 갑작스럽게 희귀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며 우리는 모두 좌절했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투병 중인 그녀에게 이 고무나무의 사진을 처음으로 보내면서 어리숙한 주인의 손길에도 얼마나 잘 자랐는지, 아직도 얼마나 쌩쌩한지 알려주었다.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는 나에게 오면서 앞날이 불투명했었던 그 고무나무도 이렇게 건강한데 아직 젊은 선배는 분명 이겨낼 거라 믿었고 그녀가 그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기운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면서 그녀는 거짓말처럼 우리를 떠났다. 그녀의 사무실엔 그녀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새 주인이 들어왔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돌아갔다. 한동안 출근만 하면 느닷없이 흐르던 내 눈물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녀가 준 고무나무는 지금도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벤자민 나무는 30년 동안 지켜봐 온 아버지를 떠났다.

선배는 사무실 정리도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부모님도 곧 나의 곁을 떠난다.

나도 언젠가 아이들을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생을 마감한 친정집의 벤자민 나무와 갑자기 사라진 그녀의 모습이 뒤엉켜 내 머릿속은 또 혼란스러워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일렁이는 가운데서도 나는 벤자민 나무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물고기들에게 말을 걸고 선배의 마음을 거쳐 나에게 온 고무나무에게 물을 준다.

왜인지 물고기들과 고무나무들은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답을 들을 길이 없으니 그냥 오늘도 두렵지 않은 척 하루를 보낸다.


-2022년 5월 어느 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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