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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Feb 01. 2021

그때 목사님이 되지 않은 이유

05

고등학교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회장을 했었고, 교회에서는 기독 학생반 부회장을 했었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밥을 먹었고, 야간 자율학습 때 성경책을 꺼내놓고 성경책을 먼저 읽고 공부를 시작했고, 혼자 복도나 길을 걸을 때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다녔으니,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이 기독교인은 아니셨는데, 졸업식 날 학부모들도 있는 마지막 자리에서 나에게 반 친구들의 미래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하셔서 내 기도로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쳤다. 


당시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어야지 하고 딱히 정해 놓은 길은 없었다. 목사님이 될 수도 있었지만, 미래의 진로를 정해 두지 않고 열어 두었다. 그때는 그저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교회 활동과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적당히 하고, 첫사랑이란 감정의 개미지옥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내 삶을 살았었더라면, 한동대를 갈 수 있었을 것이고, 한동대 졸업 후 신학대학원을 진학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대학에 진학하여 다른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의 팔짱을 끼며 "오빠"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었더라면 아내 에미마를 만나지 못했을 터이니,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나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사실 고3 때 총신대학교 신학과 원서를 썼었다. 신학과 원서를 쓸 때는 담임목사님과 교단의 노회장의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나는 그 지역에서는 나름 큰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담임 목사님을 알고 있었지만, 담임 목사님께서는 나를 알고 계셨는지 모른다.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회장을 하며 교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나, 워낙 큰 교회라서 담임목사님을 면전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내가 중고등부 회장을 할 때 담임 목사님 딸이 회계인가 총무를 했었기 때문에, 딸을 통해 나를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목사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호주로 인가 유학을 떠나더니, 이른 나이에 피트니스 클럽을 운영하는 다른 큰 교회 목사님 아들이랑 결혼했다나 하는 떠도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목사님 딸이 내 눈에 착하고 예쁘지는 않았다. 그냥 교회 동생이었고 학생회 임원이어서 함께 활동하며 교회 안에서 선후배로 지냈을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소녀 또한 같은 동아리 임원이자 친구로서 친하게 지냈을 뿐,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신학과 원서를 쓰는데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적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을 교회 성경공부를 통하여 배웠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예수 천당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다만,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가끔 의심의 구름이 내 마음을 지나가기는 한다고, 신학과에서 공부하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고 썼다. 담임목사님께서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도 않은 채, 그렇게 쓰면 떨어진다고 이렇게 이렇게 고치라고만 말씀하셨다. 담임목사님께서 직접 구원의 확신에 대한 성경공부를 다시 해주시던지입학원서는 심사 교수가 듣고 싶은 답안을 써야 한다는 입시전략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잘 설명해 주셔야 했다. 순진했는지 순수했던지 했던 나는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대학교와 신학과에 가고 싶지 않았다. 담임목사님과 노회장 목사님의 추천서를 찢어 버리고, 신학과에서 영어교육과로 과를 바꾸어 총신대에도 원서를 넣기는 했다.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추가합격으로 붙었는데, 안 가고 재수를 했다. 부모님께는 총신대가 옆에 있는 숭실대 화장실 보다 작아서 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담임목사님과의 해프닝으로 총신대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재수를 했다. 꼭 그런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려고 재수하기로 다짐을 하고, 노량진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의 순복음 교단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입소했던 때 총신대학교 영어교육과 추가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때 나는 한동대 가려고 재수할 것이 아니라,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어야 했다. 재수를 하고 한동대에는 다시 한번 떨어져서 가지 못하고,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갔다. 입학 커트라인으로는 강원대 영어교육과가 총신대 영어교육과 보다 높았는데, 그 시절 나에게 개인적으로는 총신대 영어교육과가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또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더 좋은 대학 가겠다고 세월과 돈을 들여 1년을 더 고생해서 얻을 것이 별로 없더라. 내가 있는 곳에서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었다. 




20대 때 대학교에 가서 과 선후배 동기랑 술도 마시고, 교회 음악이 아닌 세속 음악을 듣기 시작하였다.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고 늘 교회 주위를 맴 돌기는 했지만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롱 신자가 되었다. 예수를 신이 아닌 위대한 인간 정도로 생각하는 자유주의 교회에 다녔던 것도 아니고, 여전히 복음주의 보수 교회에 다녔지만, 내 개인의 신앙은 자유주의적 신앙으로 변했다. 자유주의 신앙인이 되었다기 보다도 세속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앙보다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문재인 정부에서 대한민국 좌파의 본질을 경험하면서 지금은 자유 시장 법치를 중심가치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보수우파로 전향하였지만, 20대 30대 때는 요람부터 무덤까지 복지를 책임지는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꿈꾸는 진보좌파였다. 나는 운동권 이후 세대였기 때문에, 마르크스 레닌주의나 김일성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좌파였다. 한때 문국현과 안철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그분들의 지지층에는 좌파도 있었고 우파도 있었지만, 나는 진보좌파로서 그분들을 지지한 것이었다. 광장에서 최루탄을 던지고 드러누워 경찰들과 싸우던 운동권 좌파들보다, 기업인으로서 진보좌파적 신념을 경제 활동으로 실천해온 것처럼 보이는 정치리더들을 신뢰했다. 20대 때 나는 나일롱 신자였기는 하지만, 때때로 목사가 될 생각도 없지 않았다.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라나 교회 주변을 맴돌며 살아온 사람들은, 신앙이 깊고 하나님에게 소명을 받은 것도 아닐 때도, 가끔 목사님이 되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들기도 한다.


서른 즈음 신앙을 완전히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무신론자가 된 이유는 소녀의 대한 사랑을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가 났다거나 실망하여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 실망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이 부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상이 요지경인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거나,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거나, 하나님이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이란 존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 고통의 문제와 아무리 사랑해도 내 사랑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단지 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부정했다기 보다도,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자칭 선지자들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된 다른 하나의 결정적 이유도 있었는데, 인문계라서 과학적으로 따지지는 못하더라도, 현대인의 상식으로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넌센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수능 언어 영역 지문을 읽는 것처럼 읽으면, 성경의 장르가 역사서나 과학서와 동일한 장르라기 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나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 단군신화와 같은 장르라고 판단이 되었다.


30대 초반 나는 한국 무신론자 모임이라는 국내 최대 무신론 모임에 참여하였다. 무신론 모임 온라인 사이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주요 논객 중 하나였고, 오프라인 상에서 정모와 번개에도 나가서 무신론자들과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와 비이성적 비과학적 사고들을 비판하며 친목을 도모하였다. 한 번 무신론자가 되면 대개는 평생 무신론의 신념을 가지고 살지만, 무신론 그룹은 고양이들과 같아서 교회처럼 그 모임이 지속되지가 않는다. 잠깐 필요에 따라 활성화되었다가 각자 삶을 살면서 모임은 소멸된다. 물론, 한 번 무신론자는 거의 평생 개인적으로 무신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말이다. 내세에 천국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자신 살아가는 것도 바쁜데,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대화를 나누고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삶을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고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로 살다가 목사님이신 아버지와 사모님이신 어머니께서 슬퍼하시는 것 같아서, 교회에는 다녀드리기로 했다. 부모님 교회 다니다가 부모님 교회 설교가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진보좌파였던 나에게 보수적으로 느껴져서, 신학은 보수적이나 정치성향은 급진적으로 진보적인 복음주의 좌파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런 교회는 말로는 복음적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세계관은 진보좌파 사회주의자와 세속적 인본주의자나 무신론자의 생각과 똑같기 때문에, 무신론자였던 내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전혀 부딪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목사님이신데 아들부터 다른 교회 다닌다는 것을 부모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고, 정치노선은 달랐지만 조울증으로 방황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늘 사랑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언젠가 회복될 것이라고 믿어 주셨던 분들이 우리 교회 식구들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원래 다니던 교회로 돌아왔다. 믿음이 생겨서 돌아왔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만 예수님 믿는 척하고, 세상 떠나시면 한국의 리처드 도킨스가 되어서 종교로부터 대한민국 국민을 해방시켜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교회처럼 정기적으로 무신론자들이 모여서 같이 삶과 생각을 나누고, 함께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고, 확대 가족처럼 사는 세속적 인본주의 무신론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부모님을 위해서 교회 다녀 드리고 믿는 시늉만 해드렸다.


나를 사랑해준 유일한 여자 에미마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가 신앙의 근본적 척도는 아니지만, 아내는 태어나서 단 한 방울의 술도 안 마셨다. 아내가 어렸을 때는 힌두교인이었다. 매주 힌두교 사원에 나가 동물의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도 아니었을뿐더러, 평생 단 한 번도 힌두교 사원에 가지는 않았고, 명절 때 이마 위에다가 빨간 점찍고 축제하는 정도의 힌두교 신자였다. 그러다가 동네 교회에 먹을 것 얻어먹으면서 놀러 다니다가, 17살에 하나님을 만나 영접하고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태어나서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나는 내 자발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고, 혼자 순대국밥 먹을 때 맥주 한 병이나 막걸리 하나 시켜서 반주로 마시는 정도였지만, 회식을 하거나 사람들과 만날 때는 술판이 끝날 때까지 술잔을 놓지 않고, 사람을 만나 술판 파티를 벌이는 그 분위기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말술은 아니었지만 술판이 끝날 때까지 술잔을 꺾으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의 주량은 되었다. 아내와 결혼 후에는 술을 안 마신다. 결혼 초기에는 정말 마시고 싶은 날에는, 마트에 아내 심부름을 갔을 때 아내 모르게 맥주 한 캔 마시고 입 닦고 왔는데, 언젠가 아내가 킁킁킁하며 내 입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서 '오빠, 이거 무슨 냄새예요?' 하고 들키고 난 후에는 그렇게 마시는 것도 끊었다. 지금은 아내를 위해 교회를 같이 다녀주는 것은 아니고, 아내를 만나고 결혼한 이후 다시 아내가 사랑하는 예수님과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내를 만나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살아가는 소년이었을 때 그때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지금 나는 그때 내가 아니지만, 그때 나로서는 총신대학교 신학과에 갔어야 했다. 그것이 지금의 최선은 아니지만, 그때의 최선이었다. 하나님께서 장래에 길을 열어 주시고 여건이 허락이 되면, 주간에는 직장 다니면서 일하고, 야간에는 야간 신학대학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 사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전임 사역자로서 월급을 받으면서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신학교 졸업 후에도 주간에는 직장을 다니거나 내 사업을 하면서, 야간에나 주말에 글을 쓰며 교회 사역을 하고 싶다. 아버지께서 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으시고,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면서 개척교회를 하셨던 것처럼, 나는 내 일하면서 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직장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목회 사역의 연장 선상에서 하고 싶다. 나는 목회자가 교회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전도를 한다고 전도가 되는 시대도 아니고, 성도들처럼 주간에는 삶의 현장에서 내 일을 하고, 야간과 주말에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목회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목회자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목회도 전문적인 일로서 외부에서 보기에는 먹사라고 먹고 노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다른 직업인들처럼 치열하게 목회를 한다. 나는 그런 목회를 하고 싶다. 낮에는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글 쓰고 사역을 하는 목회를 하고 싶은 생각을 해 본다. 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목사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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