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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나는 이 또한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7년 가까이 한 사람을 지독히 사랑했지만, 사귄 적도 없고 혼자 한 짝사랑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타서 재가 될 때까지 한 사람을 짝사랑하고 그리워해서 더 이상 한 터럭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여자 보는 눈과 이상형이 달라지기도 했다. 추억 속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옛 소녀는 더 이상 내 이상형도 아니고, 소녀를 향하여 뛰던 심장이 멈춘 지 오래이다. 더 이상 어떤 그리움도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첫사랑이자 지독했던 짝사랑이어서 무의식에 깊숙이 남아있어서 그랬는지 한동안 꿈에 어쩌다 한 번씩 첫사랑이 나왔다. 꿈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소녀는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평생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명제가 적어도 나에게만은 거짓이었지만, 한동안은 어쩌다 한 번씩 첫사랑이 내 꿈에 나타나길래, 무의식에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평생 꿈에서는 가끔 보겠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더 이상 첫사랑 소녀가 내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다른 여자도 내 꿈에 그리움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내 에미마를 만나고 함께 사랑하고 살아가면서, 내 무의식 세계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어두움들도 완전히 떠나가 버렸다. 첫사랑은 사랑을 처음 알게 된 그때 그 시절의 사랑일 뿐이다. 항상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는 사랑이 끝사랑이고 가장 소중한 사랑이다. 과거를 먹고사는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의 사랑을 가장 찬란했던 추억으로 간직하며 살아가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늘 지금 여기에 내 곁에 있는 사랑을 소중하게 가꾸며 살아간다.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내 의식 밑으로 가라앉아서 내 의식 속에서 사라져 가는 과거의 의식들일 뿐이다. 현재 심리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과거의 의식인 무의식의 연장 선상에서 현재 의식이 시작되었을 테고 당연히 중차대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무의식은 과거의 의식이고 잊혀 가는 과거이다. 가장 최근의 의식의 의식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무의식을 덮어간다.
첫사랑 소녀는 네이버나 구글 검색창에 연관검색어를 두어 개 넣으면 최근의 근황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사회적 위치에 있다. 어쩌다 옛 추억이 생각이 날 때면 그때 그 친구는 뭐하고 사나 검색을 해 본다. 여전히 자기 분야에서 멋지게 승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엇갈렸던 인연은 세월 속에 흘러가 버려 미래에 어디에선가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옛 친구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승승장구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지금은 나의 최고의 사랑 아내 에미마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에미마를 만나 살아가며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첫사랑 소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의 꿈은 네이버 블로그와 카카오 브런치에 글을 써서 책으로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강연이나 북콘서트 팬사인회도 하고, YouTube 방송을 하고 TV에 출연하면서, 아픈 시간을 지나온 나의 옛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현재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희망의 증거가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나의 사랑 이야기의 시작점은 첫사랑 소녀이다. 첫사랑 소녀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소녀의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구약 성경은 단순히 예수님 오시기 이전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성경의 전반인 것처럼, 나에게 첫사랑 소녀의 추억은 내 인생에 진정한 사랑 에미마를 만나기까지의 이야기의 출발점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짝사랑이었던 첫사랑 소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내 인생의 2030 청춘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상적인 인생의 괘도를 달리고 있었겠지만, 나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 에미마는 34살에 나를 만났다. 아내에게는 내가 첫사랑이었다고 한다. 비혼주의자도 아니었고,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과 사랑을 꿈꾸었고, 주변에 착하고 예쁘고 능력 있는 훌륭한 여자로 소문이 나서 결혼하자고 중신은 꾸준히 들어왔는데, 딱히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부부가 그런 이야기는 잘 나누지 않지만, 아내는 나를 만나기 전에 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하거나 하는 자체를 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배우자를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 내가 쓰고 있고 독자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은 주로 에미마를 만난 이후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 최다함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제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에미마를 만나서 행복하게 되기까지 나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제인데, 에미마를 만난 이후의 이야기보다는 주로 에미마를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에미마를 만난 이후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책은 이 책 다음으로 이어 쓰려고 한다.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의 책에서 다루기보다는, 두 개의 책에서 다루는 것이 맞다고 본다. 한 권보다 두 권으로 내는 것이 책을 만들어 파는 상업적인 면에서도 좋기도 하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던 착한 어린이가 소년이 되어 소녀를 첫사랑 소녀를 짝사랑하게 되었고,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괴롭힘으로 시작된 조울증으로 2030 근 이십 년의 청춘을 잃어버리고 방황을 하다가, 아내 에미마를 만나 사랑으로 회복이 되었고, 우리의 사랑의 열매인 아기가 아내의 뱃속에 태어나 자라고 있고, 내 적성에 맞는 새 일과 직장도 찾게 되었다.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사랑 때문에 회복되어 다시 일어난 이야기를 글과 책과 유튜브 영상으로 나누는 작가가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가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이 책에는 아내 에미마를 만나기 전에 짝사랑했던 수많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 책에서만 아내 이외에 대한 여자들에 대한 과거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 이 책 이후의 책부터는 아내를 만난 후 현재와 미래의 우리의 사랑 에세이를 내가 살아가는 동안 평생 네버엔딩으로 써 내려갈 생각이다. 이전에 모든 사랑과 인생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2030 청춘의 끝에서 마침내 에미마를 만났다는 기승전 에미마가 이 책의 결론이다.
소녀를 향하여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지만, 동아리 친구로 알고 지내기로는 1학년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공립학교였지만, 교회 다니시는 선생님께서 1주일에 1시간씩 정규 시간표에 들어가는 특별활동 동아리로 기독학생반을 만드셔서 운영하셨다. 기독학생반에 가입한 학생들은 대부분 원래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학교 동아리 활동 시간에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목사님 초청해서 말씀 듣고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레크리에이션 하는 등, 교회에서 주일학교 중고등부 활동하는 것과 같은 동아리 활동이었다. 공립학교 안에서 특별활동 동아리 시간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드리는 작은 교회였던 것이다.
우리 학교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기독학생반 또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리는 아니었다. 2학년 선배들도 있었지만, 1학년과 2학년이 함께 창단 멤버인 신규 동아리였다. 기독학생반 동아리 담당 선생님과는 별도로, 기독학생반 회원인 학생들 중에 일부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학교 동아리로서는 성에 차지가 않아 우리끼리 자체 찬양선교단을 창단했다. 그때 그 시절 안양과천 지역에는 학교마다 찬양선교단이 있었다. 우리도 그런 찬양선교단을 우리끼리 조직하기로 했다. 기독학생반은 학교에 등록한 정식 동아리였고, 찬양선교단은 학교에 등록하지 않은 우리들끼리의 사조직이었다.
찬양선교단의 공식적 설립 목적은 찬양으로 학교를 복음화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활동은 토요일 오전 수업 마치고 학교 근처 교회를 빌려 찬양 연습을 하고 신앙 모임을 가지고, 남녀공학이었으나 남녀 각반이었던 십 대 소년 소녀들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다니며 우리들끼리 돈 모아서 오뎅 떡볶이 순대 먹으러 다녔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실천했던 복음 전파는, 여름 겨울 방학 때 학교 근처 교회를 빌려 친구들 초청하여 CCM 콘서트를 하고, 학교 축제 때 나가서 율동하며 CCM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당시도 사람들은 본인이 교회에 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기독교를 개독교로 생각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닮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술 담배 안 하고 착하다고 생각되던 시대였다. 본인은 교회 안 다녀도 교회 오빠나 교회 다니는 아가씨 만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교 동아리는 학교 교육과정 안에 수업 시간의 연장으로 일주일에 한 시간 편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정도였다. 실제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동아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학교 공식 동아리는 아니었고 기독학생반 내의 일부 학생들이 만든 사조직이었던 찬양선교단은 왕성하게 활동하기로 유명했고,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는 주 5일제가 시행되기 이전이라서, 토요일에는 오전 수업을 했다. 주로 토요일 오전 수업 마치고 학교 근처 교회를 빌려 모였다. 그 외에도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과 율동 연습도 하고, 야간 자율학습 마치고 10시에 학교 앞 교회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신앙을 떠나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던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한때는 그 에너지로 공부를 했었더라면 더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았을까 잠깐 후회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생을 아주 길게 보면, 그 차이가 아무 차이가 아닐뿐더러, 빨리 간 자가 나중 가고, 나중 간 사람이 빨리 간다. 후회는 없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없는 길을 만들어 가거나 돌아가지 않고 인생의 고속도로나 KTX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사람마다 저마다 자기 인생이 있는 것 같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나온 다고 해서 다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이다. 서울대를 가도 그 안에서 앞에 서거나 아니면 자기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는 사람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그 안에서 앞에 서거나 아내면 자기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으면 승리한다. 자기 스피드대로 자기 갈 길을 가면 된다. 서울대를 가도 그 안에서 경쟁에서 밀리고, 자기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지 않으면, 인생 패배자가 되기도 한다. 고졸만 못한 서울대 졸업생도 있다. 경쟁에 밀리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밀렸는데 다른 대안과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마흔 정도 살아보니까, 성실하게 공부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항상 1등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물론 2등 3등은 하지만 말이다.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놀던 사람이 넘어갈 수 없는 벽과 거리를 만들며 앞에 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소녀를 알고 지냈지만, 이성적 감정은 전혀 없었다. 첫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같은 동아리의 다른 여학생에게 가벼운 마음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어서 주려고 하다가 전하지 못했다. 그 여학생의 이름의 한글 초성이 ㅇㅈㅇ이었는데. 짓궂은 동아리 친구가 그것을 알고서 동아리 친구들 모인 곳에서 '오 주여 나의 마음이'라는 어느 찬양의 소절을 반복해서 부르며 놀리고는 했다. 찬양의 소절 '오 주여'의 초성 'ㅇㅈㅇ'와 살짝 마음이 있었던 여학생 이름의 초성 'ㅇㅈㅇ'이 초성만 같았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여학생이 오 씨여서 이름이 '오ㅈㅇ'이었다. 차라리 첫사랑이 소녀가 아니라, 풋사랑이었던 그 여학생이었더라면, 해피엔딩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가정도 해본다. 그 사랑이 결실이 맺어 끝까지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시절 좋은 감정을 가지며 서로에 미래를 향해 경주하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인연과 추억으로 남았었을지도 모른다. 졸업하고 각각 다른 대학교 다른 전공으로 가서 각각 다른 인연으로 갈아타더라도 말이다.
아니면 내가 유독 인기가 있었던 어느 여자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던가 말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그러했듯이, 남녀공학이었지만 남녀 각반이었다. 나를 이성적으로 특별히 좋아하는 여학생은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런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다만, 여자 반 중에서 한 반에서 내가 아이돌인 그런 반이 있었다. 기독학생반이나 찬양선교단 하면서, 학교에서 보였던 나의 모습의 어떤 부분이 그 반 여학생들에게 어떠한 어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반에서만 내가 인기가 있었다. 남자 반에서는 그런 문화가 거의 없었지만, 여자 반에서는 학년이 끝나갈 때 맛있는 것 사다 놓고 파티를 하고는 한다. 그때 그 여자반에서 게임을 했는데 게임 벌칙이 우리 반에 와서 최다함이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서 노래 한 소절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가서 노래 한 곡 부르고, 한 마디 멘트 날리고 왔을 텐데, 부끄러워서 안 간 것은 아니고, 여자 반에 들어갔다가 선생님들에게 무슨 화를 당할까 봐서 안 갔다. 그 여자 반의 담임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하는 파티였기 때문에, 나를 데리러 여자 반의 칙사들이 왔을 때 마지못한 듯 따라가서 노래 한 곡 뽑고 재미난 뻐꾸기 멘트 하나 날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남녀 구분이 엄격한 학교라도, 우리 시대에도 이미 그 정도 가지고 뭐라 할 선생님은 지금 와서 돌아보니 없었다. 뭐 발바닥 몇 대 맞고, 손바닥 몇 대 맞고, 엎드려뻗쳐 몇 분 해도, 여자 반에 가서 뻐꾸기 한 번 날리고 맛있는 것 얻어먹고 오면 손해 볼 것 없는 남는 장사였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인연이 있겠지만, 나는 중고등학교 때 이성과 교제를 하더라도, 특별한 운명을 만나지 않는 이상, 인생의 마지막 인연 배필은 대학교에서 같은 과나 동아리에서 CC 캠퍼스 커플로 찾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풋사랑이었던 오주여 여학생이 첫 번째 풋사랑인 것도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 같은 교회 주일학교를 다니던 여학생이 예뻐 보이기도 했고,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여자 친구 몇몇에게 호기심이 가고 설레기도 하고 같이 놀고 싶고 그러기도 했다. 유치원 나이 때 같은 아파트 같은 나이 또래 여자아이 집에 놀러 가서 노는 게 즐겁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2학년 때 첫사랑이 시작되기 이전, 같은 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 풋사랑이 있었다는 것이지, 그 이전에도 비숫한 감정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은 아니었다.
소녀는 평범하기보다는 상당한 비범함을 가지고 있었다. 못 생겼다고 할 수도 없지만, 예쁘지도 않았고, 키도 작았다. 공부도 못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그다지 잘한 것도 아니었다. 소녀는 내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지만, 나도 그렇게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지만, 소녀보다는 내가 조금 더 잘했었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재수를 했다. 나는 강원의 춘천에 강원대학교로 진학했고, 소녀는 서울 소재 대학교에 갔지만, 우리 학교 영어교육과는 우리 학교 인문계에서는 가장 커트라인이 높고 비전 있는 학과였다. 전공을 생각하지 않고 학교를 보고 갔더라면, 나 또한 인 서울의 학교에 소녀보다 한 단계 좋은 학교 좋은 과에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 쓸데없는 허망한 후회임에도 지금 와서 돌아보면, 소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마음을 내려놓았어야 했다. 그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더라면, 더 이상 그 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소녀와 친한 친구로 지내면서, 진학을 할 때 소녀에게 어느 대학 어느 과에 갈 것인지 물어보아서 같은 학교 같은 과로 진학해서 좋은 친구로 곁에 남사친 여사친으로 있으면서 나 자신을 멋진 남자로 가꾸어 나갔어야 했다. 감정을 숨기고 소녀 곁에서 좋은 친구로 지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동아리 활동하면서 좋은 남자로 변모하다가, 소녀가 남자 친구와 언젠가는 깨질 그 타이밍을 기다렸어야 했다. 그토록 잊지 못할 것만 같은 운명의 여인이었다면 말이다.
더 좋은 시나리오는 고등학교 때 소녀 생각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다가, 대학 가서 같은 과에 동기나 선배 후배 중 더 예쁘고 착하고 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같이 공부하며 사랑과 미래를 함께 키워 나갔어야 했다. 지난날 내가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에 목숨 걸었던 성격이었던 것을 전제로 말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인생에서 사랑을 인생 목표로 삼지 말고, 내 삶을 살았더라면 예쁘고 착한 여자들이 내 번호를 따려고 줄을 섰을지도 모른다. 먼저 가장 나다운 좋은 남자가 되어서 열심히 살다가, 내 주변을 맴도는 여자들 가운데 서로 마음이 가는 사람과 한 배를 타면 되었다. 지금은 답을 아는데, 그때는 답을 몰랐다. 설령 그때 답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누구를 향하여 뛰기 시작한 심장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랑은 그러하여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사랑이 시작된 것이지, 내가 그 사랑을 시작하고 끝내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도 있다.
소녀는 교회 학생회나 학교 기독 학생반과 찬양선교단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안양 과천 지역 전체의 청소년 찬양 선교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아마도 그곳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까지 생각하며 사귀었던 것 같다. 나중에 흘려듣기로는 당시 남자 친구가 전도사님이었다고 하는데, 교회 전도사였을 수도 있지만 찬양 선교단과 관련된 전도사님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남자친구가 신학대를 가서 바로 전도사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에서도 소녀를 중심으로 몰려다니는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안양지역 연합 청소년 찬양 선교단체에서 함께 활동했었던 것 같다. 소녀는 크리스천 뮤직과 댄스에 능했다. 그 찬양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크리스천 뮤지션 CCM 가수를 꿈꾸었다. 간단한 율동을 익혀서 따라한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안무도 만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안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인간관계도 좋아서 남자 친구 외에도 주변에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도 많았다. 내가 티가 나게 소녀를 사랑했어도, 그냥 수많은 남사친 중 하나구나 생각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녀 또한 어릴 때여서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주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남성 심리를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꿈이 CCM 가수여서 레슨도 받았는데, 집안에서 부모님들이 반대하셔서 전적으로 그 길을 준비하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면서 저녁 식사를 쉬는 시간에 미리 까먹고, 그 시간에 음악실을 빌려 연습을 했었다. 가끔 내가 교무실에 가서 음악실 열쇠를 받아다가 문을 열어 주고 잠가 주기도 하고, 연습할 뒤에 앉아서 별 말없이 기도해 주고 가기도 했었던 것 같다. 1학년 때는 기독 학생반 활동과 우리 학교 찬양 선교단 일을 같이 했지만, 2학년이 되고 소녀가 기독 학생반 회장이 되고 안양 지역 찬양선교단 활동을 왕성히 하게 되고 공부도 더 해야 할 때가 되면서, 우리 학교 찬양 선교단 활동은 거의 접다시피 소홀하게 되었다. 나 또한 소녀에 대한 아무 감정이 없었던 1학년 때는 소녀와 상관없이 찬양선교단 활동을 열심히 가장 우선적으로 하였지만, 2학년이 되고 기독 학생반 부회장이 되면서 소녀와 같이 임원단 활동을 하고 소녀가 학교 찬양선교단 활동을 접게 되면서, 나 또한 더 이상 찬양선교단에 에너지를 쏟을 이유가 없어졌다.
소나기가 오면 청소시간에 청소 땡땡이치고 학교 앞 집에 달려가 우산을 가지고 소녀의 여자 반 앞에 찾아가서 주고 돌아왔다. 작은 수첩 하나를 사서, 매일매일 1년 내내 하루의 한 개씩 소녀에게 편지 글을 썼다. 일기도 쓰고, 자작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자작 소설도 썼다. 한 페이지에 작은 동화 하나를 썼는데 아직도 그 내용이 생생하다. 마귀할멈 왕비가 거울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거울이 너무 순진해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의 이름으로 소녀의 이름을 대서, 거울이 다 깨졌다는 내용의 동화였다. 볼펜뿐 아니라, 오색 색연필과 파스텔 등을 동원해서 예쁘게 편지를 한 권 가득 채웠다. 1년 동안 한 권의 작은 수첩에 하루 한 페이지씩 편지를 써서 생일날 주려고 준비했다. 결국 그것은 주지 못하고, 4절 색도화지를 가지고 손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생일 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직접적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았다. 같은 동아리 친구이며 임원단 회장 부회장으로서 때때로 서로 손편지도 쓰고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 소녀에게 나는 남자도 아니었고, 가까운 남자 사람 친구도 아니었지만, 2학년 1년 동안 같은 동아리 임원단을 하면서 자주 보았기 때문에 친한 친구 사이이기는 했다. 1학년 때도 이성으로 느끼지 않았을 뿐, 기독 학생반과 찬양선교단이 작은 동아리였기 때문에, 멤버 모두가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서울랜드 야영장으로 야영을 갔다. 텐트를 치고 캠핑을 했다. 5월이지만 산이라 새벽에 매우 추웠다. 매년 같은 곳으로 야영을 가기 때문에 그 상황을 아시는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침낭이나 겨울 파카를 준비하라고 충고를 해 주셨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나를 위한 침낭 하나와, 소녀에게 빌려 주기 위해서 두꺼운 겨울 파카 하나를 준비했다. 야영을 위한 준비물은 그것뿐만 아니라, 개인과 팀 준비물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 큰 배낭을 준비했음에도 다 들어가지 않아, 배낭 외부에 도마나 부르스타를 매달았던 기억이 있다. 왜곡된 과장된 기억인 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 배낭을 메고 한 발자국 움직이기에도 무거울 정도의 배낭을 메고, 집 근처의 범계역에서 서울랜드 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서울랜드 역에서 야영장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갔다. 군대 가서 매었던 군장보다 무거웠다. 밤이 되어서 여자 텐트 중 소녀의 텐트로 빨간 두꺼운 겨울 파카를 가져다주었다. 소녀가 고맙다고 하였다. 소녀의 텐트 안에서는 다른 남자애들이 와서 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녀가 밤새 따뜻하게 입고 잤다고 고맙다고 빨간 겨울 파카를 돌려주었다. 소녀의 체온이 닿은 파카가 기분이 좋았다. 아침 식사할 때 여자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인기 있는 남자아이들의 텐트에는 여자 아이들이 음식을 해서 가져다주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나는 다소 씁쓸하고 쓸쓸했다.
1년 동안 생일선물로 작은 수첩에 편지를 썼던 그 생일 말고, 그다음 해 고3 수능을 마친 이후 졸업하기 전 생일 때, 1월의 추운 겨울날 소녀의 집 앞으로 선물을 가지고 갔다. 그때는 아직 사람들이 핸드폰을 쓰기 이전 삐삐를 쓸 때라서, 소녀의 삐삐로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늦더라도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소녀는 아마도 안양지역 찬양선교단 모임으로 외출했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 기다렸고, 소녀는 제가 기다리다 집에 갔겠지 하고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장 추웠던 날 중 하나로 기억하는 날이었다. 반나절을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삐삐로 연락을 남겼다. 소녀가 집에서 놀란 얼굴로 내려와서 지금까지 기다릴 줄 몰랐다고 했다. 나는 선물만 주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같이 마시자는, 떡볶이라도 같이 먹자는, 그런 주변머리도 없고, 그냥 괜찮아하고 선물만 주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는 소녀 또한 내 마음이 그토록 심각했던지 몰랐었을지도 모른다. 종종 선물도 주고 편지도 했지만, 고2 마칠 때 한번 고백하고 소녀가 진지하게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한 이후에는, 평상시처럼 친구로 대해왔기 때문이다. 내 기억과 소녀의 기억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소녀는 재수를 하고 평촌에 학원가에서 재수를 했고, 나도 재수를 하여 일산에 노량진 입시학원 일타강사 출신의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기숙학원에 들어가 재수를 했다. 소녀를 마음에서 떠나보내든 떠나보내지 못하든, 소녀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입시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게 안 되면 학원에서 연애는 금지였지만, 학원 여자 친구들 중에서 예쁘고 착하고 나를 따르는 아이 친구와 학원 선생님들 몰래 뒤에서 가볍게 사귀면서 그 에너지로 함께 신바람 나게 공부하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그게 될 텐데, 그때는 그게 안 되었다. 어느 순간 내 심장이 소녀를 향해 뛰게 된 것이지, 소녀가 이렇게 이렇게 괜찮으니까 소녀를 좋아해야지 계산을 해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니었다. 소녀를 향해 자동적으로 뛰게 된 심장을 멈출 방법을 알지 못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소녀가 CCM 가수의 꿈을 위해 레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학원비라도 모아 주려고, 어머니께서 간식이라도 먹으라고 크지 않은 돈을 보내주면 모아 두었다가, 놋쇠 저금통에 하루에 몇백 원씩 크면 천 원씩 넣었다. 작은 포스트잇에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놋쇠 저금통에 동전과 함께 집어넣었다. 그렇게 1년을 모아봤자 1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한 달 레슨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입시가 끝난 후에 편지를 써서 그 당시 유명하던 CCM 가수의 앨범 카세트테이프 하나와 저금통을 소녀 집 앞에 놓고 왔다. 소녀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생각만큼 잘 가르치는 재수학원은 아니었지만, 매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과 기도로 마음을 정돈하고 관리하며 공부하는 학원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나오지 말고 그 학원에서 수능을 볼 때까지 있었어야 했다. 반년 공부하고 무단이탈하여 뛰쳐나와 기차 타고 멀리 여행을 갔다. 일종의 가출이었다. 부모님과 학원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는데,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했다. 뛰쳐나온 후에도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량진의 재수 전문학원 정진학원에 종합반을 한두 달 다니다가, 평촌 학원가의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매 순간 소녀 생각을 했지만, 공부를 아예 놓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면서, 의자에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나를 노력파 공붓벌레로 알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실제로 공부도 안 하면서 책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 바리바리 싸 가지고 다니고, 딴생각에 빠져 있으면서도 의자에는 앉아 있고 그런 스타일이었다.
고3 때 전국 석차 상위 15% 정도 되었는데, 재수 한 뒤에는 상위 9% 까지 올라갔다. 딴생각하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더라면, 그 당시 바라고 바라던 포항의 한동대에 갔을 것이다. 포항의 한동대에서 소녀를 잊고 더 멋진 사랑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랑이 계산기를 두드려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멋지고 예쁜 사람이 옆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어도, 먼저 꽂힌 사람에게 눈동자를 떼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랑은 중증의 정신질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랑은 완전 미쳐 버려서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그 불이 나를 태워 불사르는 것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재수를 하면서 소녀는 예체능 계열에서 인문 계열로 바꾸어 다른 과로 대학에 진학했다.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었는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꿈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인 서울 대학 중에서 이름은 알려졌지만, 그다지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명문대라고는 할 수 없는 그렇고 그런 대학교에 갔다. 인 서울 자체를 어렵다고 하면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재수를 하고 강원도 춘천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했지만, 학교는 지거국 지방 거점 국립대학이라는 것 빼고는 그저 그런 학교였음에도, 과가 임용고시를 합격하거나 영어실력만 있으면 비전이 있는 전공이었다. 소녀는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스트레이트로 학사-석사-박사를 하여 국내 박사를 하고, 지금은 대학교 교수님이 되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소녀의 소식을 들려올 길은 없지만, 네이버와 구글에 소녀의 이름과 근무하는 대학교의 이름을 연관검색어로 검색하면 근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TJDCNLFMF 이루었다.
나는 강원대학교는 그냥 그랬지만 영어교육과는 비전 있는 학과였지만, 상사병과 군대 부적응과 괴롭힘으로 조울증에 걸려 겉돌다가 13년 반 만에 겨우 졸업장만 땄다. 대학교에서 영어공부 하나도 안 하고 졸업한 줄 알았는데,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13년 반 동안 영어교육과를 다니면서, 주워들은 영어능력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일반인 치고는 높은 점수이지만 영어 전공자 치고는 별 볼일 없는 점수인 토익 790점으로 졸업했지만, 네팔 아내 에미마를 만나 영어를 실제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면서 영어가 터졌다. 그전에 1년 반 동안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를 하며 영어로 수업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어실력이 늘은 것 같기도 하다. 전공자 프로페셔널 실력은 안 되지만, 의사소통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전공자나 전문가 수준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최근 든다.
강원대학교에 입학한 99년 3월에 소녀에게 전화를 했다.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연락은 하지 않겠지만,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나의 마음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다음에 혹시 상황이 바뀌어 나에게 기회가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 후 나는 과 생활을 잘하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다는, 우리 과와 상관없는 컴퓨터 학과 수업만 열심히 들었다. 주로 홈페이지를 만드는 수업에 열중했다. 어머니에게 컴퓨터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고 돈을 타서 디자인 학원에 가서 어도비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등 컴퓨터 디자인 툴을 배웠다. 아직 조울증에 걸리지 않은 온전한 정신이었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정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 홈페이지와 컴퓨터 디자인도 실무적인 업무가 가능할 정도로 깊게 공부하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1학년이 수강할 수 있는 홈페이지 만드는 컴퓨터 교양 수업이 조잡하게 홈페이지를 하나 만들어 보는 정도의 수준이었지, 실제로 회사나 공공기관의 홈페이지 웹 프로그래밍이나 웹디자인을 할 수 있는 목표로 설계된 수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공부해서 내 마음을 고백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크리스마스 때 소녀에게 주소와 패스워드를 보내 주었다. 소녀의 집 주소로 선물을 보내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홈페이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소녀를 위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어린 왕자가 되고 싶다는 내용으로 이미지와 스토리를 저의 상황에 맞게 변용하여 만들었다. 소녀는 내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내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을 때, 이제는 내가 소녀를 여자가 아닌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지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재수를 했지만 빠른 생일이기 때문에 1년 더 있다가 군대에 가는 게 보통 동기들의 페이스였다.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함께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한 시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소녀에 대한 내 안에 그리움과 갈증이 해갈되어 한동안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병무청에 자원입대를 신청하였다.
어찌 보면 소녀가 나를 만나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혹시나 사고 칠까 봐서 나중에야 말씀해 주신 사실이지만, 소녀의 남자 친구가 화가 나서 어머니께 찾아왔는지 전화를 했는지 했었다고 들었다. 계속해서 연락을 했던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간 것도 아니고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고, 일 년에 한 번이나 이 년에 한 번 전화해서 마음을 전하고 선물을 소포로 보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무리 남자 친구라도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성격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정신줄을 놓기 전까지는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려고 원하지 않는 것 같으면 연락하지 않고 혼자 그리워했지만, 조울증이 발병하고 난 이후 조울증이 조절될 때까지는, 때로는 원하지 않는 연락을 할 때도 있었고, 지나친 표현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런 것도 아니고, 내 관점에서는 쌓이고 싸였다가 터진 어느 날 며칠 그러고 말았던 것인데, 그것이 상대방 입장에서는 신경 쓰였을 것이다. 소녀에 대한 7년 간에 마음이 다 정리가 되고 완전히 털어 버린 후에, 본의 아니게 소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상사병과 조울증의 병이 되어 마음을 불편한 게 있다면 이해해달라 하며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다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알겠다고 잘 지내라는 메시지를 받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때 이미 마음이 끝났기 때문에 더 연락할 일도 없었다.
미래에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고 유명 유튜버가 되어, TV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다니고 유명인사가 되면, 소녀와 예전으로 돌아가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아주 잠깐 해본 적은 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성공하여 옛 소녀가 나와 친구 할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내 에미마가 최고의 인생 친구가 되었는데, 지나간 옛 친구와 다시 친구 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움도 미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더 이상 어떤 남아있는 감정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고, 이제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알던 사람이지, 이미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모르는 사람이다. 나중에 혹시 어딘가에서 스쳐가며 만나면, 먼저 아는 인기척을 하면 굳이 모른 척까지 할 필요는 없고, 옛날 알던 친구나 동네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움을 표시하기는 할 것이다.
아내 에미마는 나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나 또한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그 어떤 일보다 아내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고 그 후에 내 일을 하지만, 예전의 사랑과 지금의 사랑은 달라졌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인생의 스텝이 꼬인 나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 사랑할 한 사람의 대상을 찾았지만 줄줄이 실패했다. 사람처럼 살기 위해 더 이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사랑한다고 사랑받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존중받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더 이상 그 누구를 향하여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보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예전에 10대 소년 시절과 2030 청춘시절 했던 사랑이 사랑이라면, 더 이상 그런 사랑은 내게 남아있지 않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지금도 분명 사랑을 하지만, 예전에 그 사랑과 다른 의미에 사랑을 한다. 더 이상 순간순간 누가 생각이 난다거나, 가슴이 두근두근 된다거나, 그리워서 미칠 것 같다거나, 그런 게 사랑이라면, 더 이상 그 누구도 나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내 인생에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있는 일을 찾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조울증 때문에 만년 백수로 살았던 내가 극복하여 직업을 가져 가치를 창출하고, 경제적 자유를 얻고,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가 일을 해 땀 흘려 딴 열매들 흘려보내고 싶다. 자아실현과 입신양명을 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 희망사항과 의지이다. 아내의 사랑으로 회복되어 인생에 자신감이 생기고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사랑으로 상사병과 조울증에 걸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과거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 에미마를 만나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내 인생 에세이 <다함스토리>를 쓰면서 소녀 사랑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옛 짝사랑이었던 첫사랑의 실패로 인생이 완전 꼬여버렸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에미마를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의 첫 책인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예쁘고 착한 여자들을 사랑하다 조울증에 걸리고 재발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론은 이 모든 아픔과 고난이 있었기에 아내 에미마를 만나 이렇게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