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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Jan 30. 2021

아 옛날이여

03 |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어린이였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부부교사셨다. 용인의 초등학교에서 같은 학교 동료 교사로서 만나셔서, 결혼하시면서 수원에 터를 잡으셨다. 태어난 장소는 어머니 출산 때 돌보아 주셨던 이모집이 서울이었던지라, 서울의 유명 산부인과에서 태어났지만, 나의 공식적인 고향은 수원이다. 타향살이를 하다가, 다시 수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선생님으로서 직장 생활하는 것보다, 아버지 봉급만으로 가난하게 살더라도 나와 동생을 직접 키우시고 싶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시골에서 가난하고 기술 없는 농사꾼으로 3남 4녀를 낳아 키우셨다. 3남 4녀의 장남인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어린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했다. 예전에는 우리 집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런 집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교사 봉급 또한 지금과 달리 얼마 안 되는 박봉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께 학교 그만두고 나와 동생을 직접 키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었는데, 할아버지께서 "그럼 어린 시동생들은 누가 키우냐? 안 된다." 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어머니께서는 왜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을까, 그냥 그만두고 우리들을 키웠을 걸 하셨다.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교사로서 사회생활을 하기보다는 우리의 엄마가 되기를 원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학교에 출근을 하셔야 했고,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어렸던 고모를 나와 동생을 돌보라고 우리 집으로 보내셨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어린 시누이가 집에 와서 우리를 돌보고 집안일을 한다는 자체가 원하지도 않으셨고 오히려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때 그 시절에는 많이들 그렇게 살았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출근하실 때마다, 나는 아파트에서 1층까지 따라 내려와 어머니 바지를 잡고 통곡하며 울었다. 한 번 안아주었더니 떨어지지 않고 울어서, 어머니께서 안아주고 싶어도 그 이후에는 안아주시지 못하셨다. 하루는 학교 가시는 어머니에게 내가 문방구에서 사표 사 오라고 했다. 어머니 일 가실 때 통곡하며 울다가, 가시고 나면 고모랑 잘 놀았는데, 어머니께는 그런 내가 안쓰러우셨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고 잘 노는데, 나는 어디만 가면 어머니 치마폭을 붙잡고 집에 가자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강했던 것 같다. 이성에 눈을 뜨면서는 사랑하는 한 여자에 대한 애착이 다른 평균의 남자들보다 강했다. 특별히 내 심리가 병리적이었다기보다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보다, 한 사람과의 아주 친밀한 애착을 필요로 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유치원 때나 초등학교 1, 2 학년 때 일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고모와 자주 놀러 갔던 옆집에는 우리 형제와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고 함께 놀았다는 사실 정도만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섬으로 발령받아 가셨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오지 점수가 있어서, 선생님들이 섬이나 깊은 산골에 있는 학교에 가면 승진에 유리한 점수를 받았다. 또한 자녀가 어릴 때 시골살이를 하면 정서에 좋지 않을까 싶어서, 젊은 부부교사 선생님들이 자녀가 어릴 때 많이들 오지 벽지로 발령받아 가시고는 했다. 3학년 때 영흥도에서 1년 살았고, 4학년에서 6학년까지 3년 동안 서해 최북단 백령도에서 살았다. 영흥도는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차를 타고 가지만, 그 당시는 배를 타고 들어갔다. 백령도는 군인이 반, 주민이 반인 섬으로서, 대한민국은 멀고 북한은 가까운 섬이다. 북한이 바로 코 앞이라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북한 주민의 이동까지 육안으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시골의 순수한 정서 속에서 어린 우리의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 주시겠다며, 섬에 들어가신 부모님의 선택은 좋은 선택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왔다. 섬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어머니께서 붙잡고 공부를 시키셔서, 초등학교 내내 1등 2등을 앞다투었다. 한 학년에 반이 하나고, 시골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백령도에서도 부모님이 외지 출신의 자녀나 섬 토박이라도 부모님이 어부나 농부가 아닌 백령도의 KT나 KBS 등 공기업의 직원들의 자녀들은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옆에 끼고 다달 학습 이달 학습과 전과를 가져다 놓고 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초등학교 부부교사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어느 정도 공부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을 테고 말이다. 다른데 정열을 쏟느라 재능을 개발하지 못한 것이지, 타고 난 무엇인가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섬이라서 1, 2등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 중학교 올라가서 초등학교 때 배웠던 내용으로 시험을 본 첫 배치고사에서 저는 전교 7등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다니던 안양의 중학교는 섬과 달리 학생수가 많았다. 물론 그다음 중학교 첫 공식 시험 중간고사에서 바로 반에서 10등 정도로 떨어졌다. 중학교 내내 반에서 10등을 맴돌다가, 반에서 10등 정도면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비평준화 시절이었고, 한 반에 50명이 가까이 되었었는데, 반에서 10등 정도는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잘한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 가서 초등학교 교과 내용으로 처음 친 배치고사에서 전교 7등 한 번 하고, 중학교 내내 반에서 10등 언저리를 맴돌다가, 반에서 10등 정도 하는 아이들이 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도 반에서 10등을 맴돌다가 졸업하였다. 내가 다니던 평촌고의 위상을 아는 사람들은 좋은 학교 갔다고 하지만, 공부 못 하거나 안 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명문고등학교까지는 아니었다. 분양받은 평촌 신도시 우리 집 아파트 단지가 학교 코 앞이라 나에게는 가장 좋은 학교였다. 집 가깝고, 일진 없고, 공부를 못하는 학교도 아니지만 명문고도 아닌, 내가 다니기에는 좋은 학교였다.


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무겁게 들고 다녔다. 쉬는 시간에도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았다. 손에서 팬을 놓지 않았지만, 머릿속 멘털은 다른 곳으로 가출해 있었다. 나를 공붓벌레라 노력파라고 생각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사실 논 것도 아닌데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가득 가지고 다녔고, 쉬는 시간에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교과서나 문제집을 보고 있던 학생이었다. 뇌는 다른 데로 가출해 있고 말이다. 


고3 때 처음 수능을 보았을 때는 전국 석차 상위 15% 정도를 하였고, 총신대 영어교육과에 추가합격을 했었는데, 여러 가지 되지도 않는 이유로 재수한다고 안 갔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욕심부리지 않고, 총신대 영어교육과 가서 거기서 열심히 공부를 했을 것이다. 재수할 때는 전국 석차 상위 9% 정도가 되었는데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동대 합격선에 살짝 모잘랐고,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합격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섬에 살다 오면서 도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중학교 공부를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그 이후 공부하는데 다소 뒤처졌지 않았나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께서 옆에서 직접 공부를 관리해 주셨는데, 중학교 올라가면서 손을 떼셨고, 어쩌다 필요할 때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고는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교육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기 보다도, 내가 학원이나 과외에 흥미를 붙이지도 못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내가 학업으로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을 때 잠깐 보내주셨던 것이지, 그렇게 학원에 돌리시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처럼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것은,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한 것도 아니면서, 자기 주도 학습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공부로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춘천의 강원대학교 영어교육과에 간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때 공부로 대학교에 갔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하고 순수한 영혼이었다. 가요 대신 찬송가와 기독교 음악과 동요와 클래식만 듣고 불렀다. 어머니께서 나와 동생이 세상 음악은 듣지 않고 어머니께서 생각하는 좋은 음악만을 듣고 자라도록 훈육하신 것도 있지만, 나는 어머니 말씀을 잘 순종했다기보다 그때 그 시절에는 가요가 재미가 없었고 CCM 크리스천 음악이 재미있었다. 같은 반이었던 혼자 이어폰으로 헤비메탈 음악을 듣던 아웃사이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어폰으로 헤비메탈을 들으면 그 친구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 같이 한쪽 이어폰을 내 귀에 꼽고 함께 들어주기도 했지만, 어머니께서 사랑하시는 찬송가 동요 클래식을 나도 자발적으로 사랑했다.


길거리에 동냥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주었다. 잘 걷지 못하고 목발을 짚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서 도울 방법은 없는지 여쭈어 보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비닐봉지 들고 동네 길에 나가서 스스로 쓰레기를 주워 담아 동네 청소를 했다.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못 견디는 결벽주의자 도덕주의자는 아니었고, 항상 사회와 이웃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싶었다. 집에 갈 차비가 없는 지저분한 거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집에 데려가 씻기고 먹을 것을 주고, 주머니의 가진 돈을 털어 보냈다.


호기심 많은 같은 반 친구들은 야한 잡지나 야한 동영상을 돌려 보았다. 지금은 야한 동영상이라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직 인터넷이 발달되기 이전 시대라, 동영상이라는 개념이라기보다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보았다. 《수학의 정석》같은 제목이 붙어 있던 비디오테이프 말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것도 한 때이고 성장과정 가운데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나는 그런 것을 친구들이 보고 있으면 다른 곳으로 피해 가서 보지 않았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때 야한 것들을 반 친구들이 돌려 볼 때,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는데, 갈라진 손가락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살색의 무언가를 보았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노골적인 야한 잡지 야동 등으로 사춘기 때의 성적인 호기심을 채우지는 않았다. 집에 책꽂이에 꽂혀 있었던 클래식 명화집의 서양 고전 명화 속의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야한 그림들을 보며 청소년기의 성적 호기심을 충족하였다. 노골적으로 다 벗어젖히는 야한 동영상은 나에게 아무 감흥도 주지 못했고,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오기 같은 야한 예술 영화에 끌렸다.




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나를 아시는 주변 어른들 가운데서도 나를 존경하는 분들도 계셨다. 나를 왕따 내지는 은따로 기억하는 친구도 있지만, 깊이 교류하는 관계는 부모님 정도밖에 없었던 것도 맞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였다. 나도 거의 모든 사람을 좋아했고, 거의 모든 사람도 나를 좋아했다. 만인의 연인까지는 아니었고, 만인의 이웃 정도는 되었다.


학교에서도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지만, 특별히 무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왕따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는 일진도 없었고, 왕따를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어디에서나 스스로 성격적으로 무리에 속하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다. 의도적으로 왕따들의 친구가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께서 설계해 주신 나의 DNA가 나를 그렇게 이끌었었다고 생각한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는 아니다. 20대 30대를 잃어버려서 현재는 자본도 부채도 아무것도 없지만, 내게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여가 시간에는 글과 책을 쓰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있다. 나는 지금이 어렸을 때 찬란했던 그 시절보다 더 좋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지금 손에 든 것이 아무도 없지만, 아내 에미마와 뱃속의 아가 사랑이와 함께하는 지금이 나는 좋다.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평생 사랑하며 함께 갈 수 있는 인생의 파트너인 에미마와 뱃속의 아가 사랑이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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