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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Jan 30. 2021

다함스토리

02 | 프롤로그

49번, 최다함. 이름이 참 좋네요. 무슨 뜻이에요? 누가 지어주셨어요?

정확하게 49번은 당연히 아니다. 이제 마흔두 살이니 중학교 고등학교 때 몇 번이었는지 기억에 있을리가 없다. 옛날 옛적 나의 추억을 이거하기 위해 의미를 붙들어 두기 위해 중학교 3번 고등학교 49번 상징적으로 기억하는 숫자이다. 키 순서로 번호를 정했던 중학교 때 반에서 3번 정도 되는 땅꼬마였다는 뜻이다. 성씨의 가나다 순으로 번호를 정하던 고등학교 때 최 씨인 내가 49번이 정도 될정도로, 그때 그 시절엔 학급당 학생수가 콩나물시루였다는 뜻이다.


내 이름은 최다함이다. 동생 이름도 예쁘고 의미 있는 이름인데, 어릴 때 친구들이 이름 가지고 놀려서 이름으로 스트레스 받을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놀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콤플렉스를 가지는 그런 시절이 있다. 나는 내 이름 최다함에 대해 프라이드를 가지고 살아왔다. 지금은 본명 최다함을 필명, 아이디, 닉네임, 퍼스널 브랜드로도 사용해 왔다. 내 동생 이름은 태어난 후 출생신고를 앞두고 서둘러지으셨다는데, 내 이름 최다함은 어머니 아버지께서 내가 태어나기 이미 오래전부터 성별과 상관 없이 미리 지어놓으셨다. 그 시절에는 산부인과에서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윗과 아브라함', '선을 다하라.',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세 가지 뜻으로 내 이름을 최다함이라고 중의적으로 지으셨다.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은 경험은 기억에 없다. 다만, 매 학기가 시작될 때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과도한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역사적 사명이 담긴 의미심장한 이름값을 하느라, 그동안 인생이 꼬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미래의 아기가 생기면,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부르고 듣기에 예쁘고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다. 본인의 삶의 스케일은 살아가면서 본인의 깜냥대로 만들어 가면 되지, 이름으로 그 범위를 한정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평범한 이름이라고 해서, 철수와 영희 같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것 또한 아니었다. 최영하, 최사랑, 최하나 같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아내가 네팔인이니 아기의 이름도 글로벌하게 '최데이비드' '최그레이스' 이렇게 짓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적도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의 아기가 드디어 찾아아서, 태명을 '사랑이'라고 지었다. '사랑이', '사랑아' 이렇게 부른다. 




아주 어렸을 때, 내 인생 가운데 가장 최초의 기억 가운데 하나가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을 때, 어머니께서 산타할아버지께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어머니 머리맡에서 성경 동화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했는데, 이스라엘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찾아와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소원을 말해봐'하고 말씀하셨다. 우리 시대에는 램프의 요정 지니 대신, 소녀시대가 우리에게 '소원을 말해봐'라고 노래를 불러주었지만 말이다. 아재개그이니 여기서 한 번 웃어 주어야 작가가 민망하지 않다. 솔로몬 왕은 금은보화 대신 오직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솔로몬 왕은 훗날에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되었다. 꼬마 시절 나는 솔로몬 왕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혜를 달라고 대답했다. 그 응답인지 몰라도 가족과 주변 지인으로부터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고는 했다. 아내 에미마는 종종 내게 'Very Very Clever'하다고 말한다. 순수했던 내가 오랜 방황을 거치고 세상과 사람이면의 어두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나의 세계관도 비틀리고 꼬여서, 지혜로움이 영리함으로 변형 되었는지도 모른다.


3대째 예수님을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과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20대 때는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롱 신자가 되었고, 30대 때는 하나님을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10대 때 나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모두 내가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사님이 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목사님이 되는 것 자체가 꿈은 아니었다. 나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 특별한 직업과 진로와 관련된 장래희망으로서의 꿈은 없었다.


꿈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하나의 목표와 소망은 있었다. 그때 그 시절 독실한 기독교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한동대는 인문계와 자연계만 구분하여 무전공으로 입학한 후에, 1학년 다녀보고 전공을 선택하기 때문에, 일단 한동대에 합격한 후에 학교 다니면서 전공을 선택하면 되지 생각했었다.




하나님 사랑의 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녀 사랑의 꿈이 되었다. 예수께서 인류를 사랑하셔 십자가의 달리신 것처럼,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 오혜성이 자기 인생이 파멸하기까지 엄지를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소녀에게 나는 예수님도 까치 오혜성도 아니었고, 소녀 또한 엄지가 아니었다. 소녀를 사랑했지만, 소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1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 내 마음을 고백하게 되었는데, 나와 같은 나이였던 소녀에게 결혼까지 생각하며 진지하게 만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소녀는 결국 그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지금은 결혼은 했는지 잘 모르지만,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랑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심장이 갑자기 뛰면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소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소녀를 향에 이미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을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재수를 하고 강원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졸업 이후 길에서 우연히 한 번 만난 것과, 전화와 이메일로 몇 번 연락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인연이 닿지 않았지만, 365일 24시간 순간순간 소녀를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대학교 같은 과 동기들이 군대에 가는 시기보다 1년 앞서 자원하여 군대에 갔다. 군대 간다고 하면 소녀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녀와 커피 한 잔이면, 소녀를 향한 그리움과 갈증이 해갈되어 군생활 2년을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소녀가 보고 싶었다. 그런 심리 상태로 군대에 갔고, 고문관이라고도 불리는 관심병사가 되었다. 입대 후 3개월 만에 조울증에 걸렸고, 입대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의가사 조기 전역을 하였다. 우리 나이로 스물한 살의 나이였다. 나 스스로는 소녀에 대한 상사병과 군대에서의 정신적 괴롭힘으로 조울증에 걸렸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나님 외에는 내가 왜 조울증에 걸렸는지 의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몇 가지로 근거가 있는 추정을 할 뿐이다. 고2 때 시작된 소녀의 대한 첫사랑은 에누리 없이 딱 7년의 세월이 지나간 후에야 끝이 났다.


소녀에 대한 사랑이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했다. 누군가 사랑할 한 여자가 나에게는 필요했다.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학생 시절 모두에게 이성으로서 매력적인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일부의 이성들에게는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괜찮은 소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지 않는 소녀를 첫사랑으로 내 인생의 사랑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그 어떤 여자도 첫사랑을 향한 상사병으로 조울증에 걸려 나사가 빠진 남자에게 연민을 느낄지언정 사랑에 빠질 리가 없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들만 골라 사랑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내 처지는 모르고 눈만 높았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한 죄로 내 인생의 청춘 2030은 완전히 꼬여 버렸다.


조울증에 걸려 긴 세월 방황하다가 13년 반 만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일했다. 좋은 영어교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할 타이밍에,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내 눈에 보였다. 예쁘고 착한 여자가 첫사랑에 목을 매다 인생이 너덜너덜해진 나에게 심장이 녹을 리가 없었다. 살면서 지나간 대부분의 사랑들이 나를 슬프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랑은 나를 아프고 병들게 했다. 치명적으로 예쁘고 착했던 소수의 여자들은 나에게 팜므파탈 경국지색이 되었고, 조울증이 재발하여 정신병원에 수차례 반복하여 입원하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경력이 단절되어 원하지 않게 만년 백수이자 부모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니트족이 되었다.




동생이 필요로 할 때 동생 사업장에 가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청소를 하였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는 태백의 정신지체 생활시설에서 살면서, 생활복지사로 일하며 온라인으로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중등학교 영어교과 정교사 2급 자격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은, 반복된 조울증 재발로 경력이 단절된 내가 재취업을 하여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데 아무 도임이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평생직장으로서 왕대추농장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아버지 고향이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평생 사시던 논산 시골집으로 귀농을 하셨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사랑과 결혼을 포기했을 때, 둘째 고모의 지인을 통해서 아내 에미마를 소개받게 되었다. 세상에 그 어느 여자가 나를 사랑할까 하며 사랑과 결혼을 이미 포기했을 때였다. 사랑과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한국 여자랑 하지 국제 연애나 결혼을 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내 에미마는 나의 사정과 형편을 다 듣고도 믿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와 결혼해 주기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첫사랑 때 이상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자'이었고, 2030 청춘의 때 이상형은 '예쁘고 착한 여자'이었다. 에미마를 소개받았던 마흔 즈음에 이상형은 더 이상 예쁘고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미마는 자기가 나를 사랑해 주면, 하나님께서 나를 치료해 주셔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라는 기도응답을 받고, 나를 사랑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만나본 아내 에미마는, 내가 이전에 사랑했던 그 어느 여자들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쁘고 착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였다. 내 인생의 최고의 사랑 에미마가 먼저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2018년 6월부터 우리는 카카오톡으로 연애를 했다. 네팔 가는 경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네팔 카트만두에서 에미마를 처음 만난 그해 9월 10일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약혼식을 했고, 그 다음날 장인어른 장모님은 고향으로 보내드리고 우리 부모님과 함께 히말라야 안나프루나가 있는 포카라로 2박 3일 약혼 여행을 갔다. 같은 해 12월 네팔에 다시 들어가 2018년 12월 18일 네팔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아내의 결혼비자 수속과 대학원 논문 통과를 위해 6개월 동안 네팔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함께 인천공항에 들어왔다. 네팔에 사시는 에미마 부모님을 한국으로 초청해서 2019년 6월 수원에서 한국의 지인들을 모시고 결혼식을 한 번 더 올렸다. 우리는 네팔 카트만두에서 한 번, 수원에서 한 번, 총 두 번 결혼식을 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책 「다함스토리」는 나 최다함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소년이 사랑이란 무지개를 찾아 방랑해 온 이야기, 사랑을 찾아 헤매다 조울증에 걸려 2030 청춘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마침내 진정한 사랑 에미마를 만나게 된 이야기이다. 세상에 없는 사랑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쁘고 착한 아내 에미마를 만나,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최다함의 이야기가 <다함스토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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