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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Feb 07. 2021

깊은산속옹달샘 아침지기

2015년 꽃 피는 봄이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쓰시는 고도원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충주의 명상치유센터 <깊은산속옹달샘>의 '녹색 뇌 프로젝트' 2주 코스에 참여하였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집에서 쉬다가, 가출을 하고 집을 나가 강남역 고시원에서 조울증 약도 안 먹고 혼자 살았다. 조울증이 재발하여 병원에 3개월 입원하다 퇴원했다. 조증은 진정되었는데, 병원에 있는 동안 살은 찌고, 무기력해졌다. 어머니께서는 큰고모의 추천을 받아 명상센터 깊은산속옹달샘의 2주 간의 명상치유 프로그램에 보내주셨다. 참가비가 비쌌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살려보려고 보내셨다.


2014년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초등학교의 1학년 여자 선생님이 치명적으로 예쁘고 착했다. 그래서 나는 아팠다. 손가락 까딱할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책상에는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더미가 쌓여 있었고, 다음 날 수업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학교에 출근하지 못한 채, 혼자 살던 원룸에서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지만 내 성격이 모질지 못해서, 세상을 떠날 수 있을 만큼의 물리적인 선을 넘지 못했다. 


식칼로 손목을 그었는데 식칼이 무뎌서 피도 나지 않았다. 복용하던 정신과 약 남은 것을 모아 다 털어 먹었지만, 정신이 희미해지지 않고 여전히 또렷했다. 손으로 직접 메는 넥타이가 아닌, 다 묶여 있고 목에다 껴서 쭉 당기면 되는 넥타이를 목에 걸고 쭉 당겼는데 목만 아팠지 여전히 숨은 잘 쉬어졌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으로 섬유유연제 피존을 마셨다. 다른 것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는데, 마지막 들이마신 피존이 죽도록 고통스러웠다. 바로 잠이 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출근하지 않고 원룸에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 어머니와 고모부께서 나를 데리고 아주대 병원 응급실로 가셨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도록 위독했던 것은 아니었다. 피존을 마셨고 조울증 약을 털어 먹었다고 하니 혹시라도 걱정이 되셨는지 어머니께서 나를 응급실로 데리고 가셨다. 세상과 작별하기 위한 다른 시도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는데, 들이 마신 피존만 나를 극강의 고통으로 밀어 넣었다. 나중에 들은 사실은 피존은 마셔도 인체에 해를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마시면 극강의 고통을 가져다 주지만, 세상을 등지게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해는 미치지 않는다. 원래 그렇다기보다 피존 샴푸 비누 등등은 혹시라도 먹더라도 인체에 무해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나에게 그 어떤 고통도 주지 않았던 털어 먹은 조울증 약이었다. 하루의 적정 양을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다량의 약을 한꺼번에 털어 먹을 경우 당연히 위험하다. 당시 다니던 병원 주치의에게 전화를 해서 그때 남아있던 약의 정도를 확인했는데, 상당한 농도 이상의 양이라고 판단되어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조울증 약을 털어 먹은 것을 토해 내느라고 위세척을 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병원 다니면서 다른 어떤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강의 고통이었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아픈 고통들이 있겠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그 어떤 고통 중에서 위세척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고통은 없었다. 위세척 당시 너무 고통스러워서, 위세척 당시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나는 독하지 못해서 모질지 못해서 절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고통스럽기만 할 테니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 후에도 수도 없이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극단적인 선택은 실행한 것은 그때 한 번뿐이었다. 죽더라도 약을 털어 먹는 방법은 생각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실패하여 살아남을 경우 위세척하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 날이 아마도 수요일이었다. 연차 내고 목요일 금요일마저 쉬고, 그다음 주 아무 일도 없었듯이 출근해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동안 쌓아 둔 일을 눈썹 휘날리게 처리하고 무사히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이하면 되었다. 어머니께서 나의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대신하여 내가 근무하던 학교 교장실에 가셨을 때, 교장선생님께서 먼저 그런 제안을 하셨다. 지금이라면 그랬을 텐데, 그때는 그것이 안되었다. 


그때 병원에 가서 주치의에게 내 상태를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부모님께서는 조울증으로 과대망상이 일어나 사고를 친 것은 아니고, 여자 때문에 극단적인 조치를 잠깐 취한 것이기 때문에,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잠시 쉬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나중에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깨달은 것은, 우울증이 아닌 조증 상태에서도 자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울증보다 조증에서의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자살시도를 했다는 사실 만으로, 정신과에 가서 전문의와 상담을 해볼 필요가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도, 생각과 시도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무의미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살은 찌고 뚱뚱해졌다. 어머니께서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회복되어 오라고, 예전에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시던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에 세우신 동두천 두레수도원 10일 금식기도에 보내 주셨다. 효소와 차와 동치미 국물만 마시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10일 동안 금식하는 프로그램이지만, 비용이 상당히 비쌌다. 비용과 상관없이 어머니께서는 아픈 아들을 살려 보려고 금식기도에 보내셨다. 


금식기도에는 미국에서 의사를 하다가 은퇴하신 노의사 한 분이 닥터로 참가하셔서 금식이 참여자의 건강에 혹시 악영향을 미칠 부분에 대하여 일종의 메티컬 체크를 했다. 두레수도원과 김진홍 목사님께서 돈을 주고 모신 분은 아니었던 것 같고, 두레수도원과 김진홍 목사님의 가치와 맞아서 은퇴하신 노의사께서 재능기부 차원에서 스태프로 참여하셨던 것 같다. 후에 그 의사 선생님께서 두레수도원과 모종의 일을 같이 하는 것을 의논하는 과정이었던 것도 같다. 10일 금식에 들어가면서, 조울증 약을 먹어야 할지 먹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약을 먹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조울증 환자가 약을 끊는 것은 더 좋지 않다. 노의사 선생님은 약을 먹으면서 금식을 하는 것과 약을 끊고 금식을 하는 것 사이에서 내가 선택을 하라고 했다. 나는 어차피 직장에 다니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약을 끊어 보기로 했다. 금식과 기도로 조울증을 극복해 보려고 했다. 


오전에는 김진홍 목사님 말씀을 듣고 체조를 했다. 오후에는 독서를 하고 수도원 뒤에 제법 높이가 있는 산을 등산했다.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였다. 참가자 가운데 제일 결과가 좋았다. 10일 금식하면서 5Kg가 빠졌고, 집에 와서 보호식을 하면서 5Kg가 빠져서, 총 10Kg이 한 달 사이에 빠졌다. 정신도 맑아졌다. 조울증 환자가 먹던 약을 끊으면 어느 정도 기간은 정신이 더 맑아지기도 해서, 살짝 기분이 뜨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더 좋아 보이기도 한다. 보통 사람도 기분이 살짝 뜨면 평소에 안 되는 일도 될 것만 같다. 문제는 정상적인 기분 안에서 긍정의 힘과 자기 관리로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것과, 조울증 증세에서 약을 먹지 않아서 기분이 뜨는 것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조증은 기분이 살짝 뜨는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살짝 뜨는 상태를 찍고 점진적으로 끝도 없이 기분이 떠서, 감당 못할 선을 넘어 사고를 치게 되는 것이다.


김진홍 목사님께서 1대 1로 모든 참석자를 상담해 주셨는데, 나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셨다. 두레수도원에서 1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서, 집으로 내려가면 미국 두레마을에 잠깐 가 있기로 했다. 미국 두레마을 대표 목사님께서 김진홍 목사님 밑에서 두레수도원 10일 금식기도 프로그램을 진행해 주시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한국에 오셨다. 그 기간 동안 그 목사님과 친해져 금식기도 후에 미국 두레마을에 가기로 했다. 비행기 값은 내가 내고, 미국 두레마을에서 자원봉사하며 숙식은 거기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해 가을 김진홍 목사님께서도 미국 두레마을에 성경공부 인도하시러 가는 일정이 있으셨다. 김진홍 목사님도 나에게 그때 미국에서 한 번 보고, 두레수도원 두레마을에 들어와 같이 살자고 하셨다. 거짓말은 아니고 진심이었겠지만, 그분 살아오신 행적을 볼 때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도 같은 말을 던지셨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던지시는 말씀도 아니시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던지신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산을 내려왔는데, 미국 두레마을에 가지도 않았고, 다시 그 산에 올라가지도 않았다. 약을 끊고 얼마 동안은 괜찮았다. 대형사고가 터질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 통장에 있던 모든 돈과, 부모님께 맡겨 놓은 모든 돈을 빼서, 집을 나왔다. 강남역 근처 사람이 살만한 환경의 럭셔리 고시텔에 들어갔다. 보통의 고시원보다 좀 비쌌을 뿐이다. 정치를 한다면서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다. 나는 정치를 한다고 돈을 썼는데, 엉뚱한 곳에 내 전 재산을 다 털어 먹었다. 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인데,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돈을 며칠 사이 다 쓰고 다니는 것이다. 


정치를 한다며 돈으로 우정과 사랑을 샀다. 사람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돈으로 우정과 사랑을 사고 싶었다. 밝은 양지를 떠나 어두운 음지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친절과 선의와 사랑으로 대했다. 내가 지불한 돈만큼, 내가 그들을 존중한 만큼, 딱 그 돈의 가치만큼만 나를 우정과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그들과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지만,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한 번 쓰면 바로 앵꼬가 나서 충전되기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는데, 그때 즈음되면 돈으로 만난 우정과 사랑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모르는 인연이 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간 후였다.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지만 부모님께서는 내가 심각한 조울증이 와서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니며 위태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나는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 싶지 않아 폰 번호를 바꾸었다. 부모님께서 심신 미약으로 나를 경찰서에 신고하셨고, 경찰서에서 부모님이 나를 찾는다고 집에 전화하라고 연락이 왔다. 폰 번호를 바꾸어도 주민등록이 말소되지 않는 이상, 충분한 사유가 있을 경우 가족이 부탁하면 경찰이 가족에게 직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는 않아도, 경찰이 나에게 전화해서 집에서 찾고 있으니 연락해 보라고는 할 수 있다.


나는 부모님이 나와 협상을 하여서 내 요구조건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부모님께 연락해서 강남역 인근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내 요구사항은 나한테 줄 몫으로 강남역 근처의 10평 원룸 하나 사 주고, 부모 자식 관계를 끊고 호적에서 나를 파 주고 남남으로 살자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울증으로 상태에서 나는 그 사랑이 징글징글했다. 또 하나 오판했던 부분은, 초등학교 부부교사셨던 부모님이 내 몫으로 강남역에 10평짜리 방 하나는 사 주실 수 있는 재력이 되시는 줄 알았다. 조울증으로 아픈 큰 아들 몫으로 마지막으로 강남역에 방 하나를 사주고 부모 자식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재력이 되시는 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원룸이 아니라, 강남역 10분 거리에 레지던스 호텔이었다. 상층부는 호텔이고, 하층부는 개인에게 분양을 했다. 개인에게 분양한 하층도 구조와 인테리어는 호텔과 똑같다. 살다가 안 쓸 때는 레지던스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고 나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수익 부동산이라고 했다. 호텔 하층의 방 하나를 분양받는 것이었지만 호텔에 사는 것이었다. 호텔 식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호텔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할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TV 보고 인터넷 하면서 오피스텔처럼 일하고 거주하며 살고 싶었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양가가 2억인가 3억인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남역 10평 룸 하나를 2억 3억에 분양을 받을 수 있나 싶은데 내가 받은 분양 상담 상에서는 그랬다. 호텔 조식이나 피트니스 클럽 등 고급 커뮤니티 공간이 있는 주거공간은 관리비가 비쌀 텐데, 분양 사무소 사람들 말로는 호텔 하층의 레지던스라서 관리비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이게 가능한가 싶다. 내가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잘못 이해한 것인지, 과장광고에 눈탱이를 맞을 뻔한 것인지는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 부부교사셨던 부모님께서 아픈 아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강남역에 10평짜리 방 하나 사주시고 부모님 인생을 사실 수 있는 경제력이 되실 것이라고 착각했다. 


내 생각이 아주 틀렸던 것은 아니었던 것은, 교회 헌금 안 하시고, 이웃들에게 넉넉하게 베풀지 않으시고, 부동산 주식 등 전략적으로 자산관리를 하셨더라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 부부교사 중 그런 분들도 계시다. 부부교사로서 두 분 다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시면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라고도 한다. 그런 분들은 계절별로 해외여행 다니시고, 골프도 치시면서 노후를 보내신다. 


어머니께서는 정년까지 안 가시고, 20년 하시고 명예퇴직하시기는 했다. IMF가 왔을 때 정부에서 퇴직금 많이 주면서 대규모 명예퇴직을 유도했던 때가 있었다. 어머니께선 평소 교직과 직장생활에 미련도 없으셨고, 기독교 상담과 목사 사모로서의 사역과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때 미련 없이 교직을 떠나셨다.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었고,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국내 정도는 갈 수 있었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치 있는 활동이라면 지원해 주셨지만, 교회 다니시면서 헌금하시고 주변 이웃들에게 베푸시며 사셨기 때문에, 보유하신 재산은 별로 없으셨다.


내가 스무 살 때는 한창 일 하실 때고, 경제적 심리적 여유가 있으셔서, 춘천의 우리 학교 우리 과 사무실 근처 해 잘 드는 신축 원룸을 월세가 아닌 전세로 얻어 주셨지만, 2014년 조울증이 다시 한번 심하게 재발하여 내 인생 2번째 위험했던 위기였을 때는, 아버지께서 정년퇴직을 앞두고 경제적으로도 내리막길을 걷고 계시던 때였다. 연금으로 두 분 생활하시고, 교회 헌금하시며 주변 이웃들 소소하게 돌보시고, 조울증으로 독립하지 못한 큰 아들 용돈이나 주실 정도이지, 두터웠던 중산층이 무너지고 서민이 두터워지는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적 구조 변화 속에서, 어머니 아버지 또한 중산층에서 서민으로 몰락하시고 계시는 중이었다.


부모님 두 분과 식사를 했지만, 사실 근처에 물리적인 힘이 건장하신 작은 아버지 내외 분이 대기하고 계셨다. 식사를 마치시고 작은 아버지 내외 분이 근처에 계시는데, 같이 시간을 가지면 어떻냐고 하셨다. 나는 그때 상황을 오판했다. 부모님께서 나와 협상하고 내 요구조건을 들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 내외 분은 식사를 했던 근처에 어딘가로 들어가시기를 원했지만, 나는 내가 분양받고 싶은 호텔 하층의 레지던스 1층의 카페로 모시고 갔다. 


내가 살고 싶었던 호텔 레지던스 1층 베이커리 카페의 빵 맛은 죽여줬다. 그 레지던스에서 살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1층 베이커리의 기가 막힌 빵 맛이었다. 비즈니스로 출장 오거나 거주하는 외국인이 주로 거주하는 비즈니스호텔 1층의 베이커리 카페였다. 파리바게트 빵만 먹어 본 나에게는 그 맛이 예술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내외 분과 대화로 협상을 하려고 했는데, 미친 멧돼지를 마취총으로 포획하는 것처럼 작은아버지께서 갑자기 나를 덮치셔서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했다. 경찰을 불러 수갑을 채우고 가까운 파출소로 데려갔다. 마침 로비 베이커리 카페의 빵 맛이 맛있는 레지던스 호텔 옆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나는 협상하려고 테이블에 앉았는데, 부모님과 작은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파출소에서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내외분의 얼굴도 쳐다보지도 않고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공권력인 경찰에게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의 협조를 했다.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내외 분으로부터 경찰이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친절하게 대해주기는 했다. 경찰은 내가 협조적이라는 것을 아시고, 수갑을 내가 불편하지 않고 아프지 않도록 넉넉히 풀어 주고,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나와 부모님 사이의 거리를 유지시켜 주었다. 부모님과 작은아버지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려 오셨지만, 경찰 눈에는 나만 아파 보였던 것은 아니고, 부모님과 작은 아버지 내외 분도 흥분하셨다고 보였을지도 모른다. 흥분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최대한 얻어낼 것은 얻어 내고, 부모 자식 관계를 끊기 위해, 부모님 안 계실 때 집에 들어가서, 행패를 부려 놓고 간 일이 있었다. 부모님 방에 책장의 정리된 책을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 놓았다. 컵과 그릇 몇 개를 바닥에 던져 깨 놓았다. 흥분한 마음으로 행패를 부린 게 아니라, 냉정하고 차가운 마음으로 아들로서 마지막 몫을 최대한 받아내고 부모 자식 관계를 청산하려고, 비즈니스 마인드로서 계산하고 한 일이기는 하다. 영화에서 철거 용역들이 쇠파이프 들고 가서 돈 받은 만큼 자기 맡은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흥분한 마음이 아닌 냉정한 계산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조울증 재발로 일어난 일이지만 말이다. 조울증에 걸려 착했던 내가 건달이 삥 뜯는 영화에나 나오는 행동을 부모님께 한 것이었다.


부모님께서 만들어 주신 기본 인성이 있어서, 조울증이 극도로 심했을 때를 제외하면, 화도 잘 안 내고 욕도 안 하는 편이다. 조울증 상태가 심해지면, 평소 내가 절대로 안 하던 짓을 한다. 조울증을 포함한 정신질환의 무서움이다.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과거를 고해성사하거나 재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 제정신 차리고 잘 살고 있으니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나 가족들을 위해서, 조울증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조절하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하고, 조언을 해주고 싶은 것이다. 조울증은 지랄 같은 병이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조울증에 대해 잘 알면 결코 어려운 병은 아니다. '완치'의 개념을 생각하면 안 된다. 매일 밤 비타민처럼 약 몇 알을 먹어서 약물의 혈중농도를 적정량 유지시켜 주면 정상적인 기분 유지가 가능하다는 '조절'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약 먹으면 괜찮고, 약 먹으면 지랄 같다. 간단한데 간단치 않은 것은, 조울증 환자가 본인이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하는 상태를 인정하고 매일 밤 약을 먹는 게 어렵다.


퇴원 후 강남역 인근 고시텔로 다시 돌아오려고, 로비의 베이커리 카페의 빵 맛이 죽이는 레지던스 호텔 바로 옆에 있던 고시텔 주소를 부모님께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서울 강남 근처의 대학병원이나 광진구의 국립정신건강센터에 입원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께서는 집에서 가까운 병점역 근처 병원과 이미 입원 상담을 해 놓으신 상태였다. 지금은 화성 봉담의 개인 클리닉에 다니는데, 현재 주치의 선생님을 병점역 입원 병원에서 만났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병원을 옮기시면서, 나 또한 병원을 옮겼다. 주치의 선생님이 떠나셨는데 입원 전문병원으로 외래를 다닐 필요는 없었다. 입원 병원 외래는 토요일 진료를 보지 않아서, 다른 일을 하면서 병원에 약 타러 다니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조울증이 재발하여 그 입원 병원에 다시 입원하고 퇴원하는데, 원장님께서 전 주치의 선생님께서 봉담에 개원하셨다고, 원하면 주소 알려줄 테니 그리로 가라고 하셨다. 입원이 아닌 이상 내가 그 병원에 외래를 다니지도 않기도 했고, 그 병원에 원장님 밑에 페이닥터 과장님 부장님 선생님들이 대부분 고려대 의대 선후배였기 때문에, 선후배 간에 밀어주고 당겨주는 끈끈한 의리가 있다고 한다. 입원 전문 병원이기 때문에, 외래 클리닉과 직접적으로 경쟁관계도 아니고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명상센터 옹달샘에 <녹색 뇌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다. 고도원 작가님께서 맨 앞에 앉으시고 그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면서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처음 본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포옹을 한다. 코로나라서 이런 옹달샘 만의 문화는 중단되었고 코로나 후에도 사라질는지도 모른다. 명상센터 깊은산속옹달샘 안에서만 가능한 문화였다. 명상센터 옹달샘 직원을 아침지기라고 부른다. 아침지기들이 앞장서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모든 사람을 꼭 껴안아 주지만, 아침지기도 프로그램 외의 시간이나 밖에서는 자기들끼리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옹달샘 이사장님 고도원 작가님께서도 옹달샘 밖에서는 그러시지 않을 것이다. 명상센터 옹달샘 내부에서 참가자들의 힐링을 위한 하나의 심리적 장치일 것이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감 포옹을 하고, 옹달샘 명상요가 및 힐링 프로그램을 하고, '서양의학+동양의학+자연치유'의 3박자 전인치유라는 녹색 뇌 프로그램을 하면서도, 내 마음이 크게 열리지는 않았다. 아파서 혼자 집에 있다가 오래 간만에 밖에 나와 사람들이랑 만나고 여러 프로그램에 참석하여 활동하니 심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프로그램이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흥미롭지도 않았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 또는 식사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 같이 다니는 멤버들끼리 옹달샘 뒷산에 산책 다니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었다. 또래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였다. 쉬는 시간 옹달샘 뒷산으로 산행을 하다가, 문득 분위기를 주도했던 리더 역할을 했던 아저씨 한 분이 "다함 씨, 시 한수 읊어봐요." 그러시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하는 시도 없고, 내가 지은 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이 있어서, "제가 지은 시가 있는데요. 그 시를 읊어도 될까요?" 했다. 모두들 "그러면 더 좋지." 하였다. 그래서 나의 자작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읊었다.



모두들 너무 좋다고 했다. "제가 이 시로 만든 자작곡 노래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실래요?" 했더니, 모두들 "좋지." 하며 내 노래를 경청해 주셨다. 노래를 다 마치고 나니, "Amazing" 하면서 모두 박수를 쳐 주셨다. 그날 저녁에 전체가 모여 다시 한 마디씩 좀 더 깊은 자신의 내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처음에 한 마디씩 할 때는 간단한 자기소개만 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깊은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놓는 시간을 가졌다. 내 순서가 되었을 때, 같이 산행을 했던 형님들과 친구들이 내가 지은 시와 그 시로 만든 자작곡이 있는데 너무 좋다고 한 번 시켜보자고 판을 깔아 주셨다. 고도원 작가님께서도 좋다고 해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뜨거운 호응과 박수를 받고 나의 마음이 열려서, 그동안 사랑 때문에 아파서 조울증에 걸리고 재발했던 이야기 그래서 여기에 온 이야기 등등 내 이야기보따리를 요약해서 풀어놓았다.


쉬는 시간에 아침지기 한 분이 다가와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내 이야기를 너무 잘 들었다고 했다. 환한 미소로 응원해 주었다. 아침지기는 당시 결혼 전이었고 사귀는 남자가 없는 솔로였는데, 아침지기 가운데서도 여신 중 여신이었다. 원래 요가 강사였는데 옹달샘에 청년 자원봉사로 찾아왔다가 옹달샘에 아침지기로 눌러앉았다. 옹달샘 요가도 하고, 치유 여행 진행도 하고, 웃움요가도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옹달샘 여신이었다. 아파서 옹달샘에 치유 차원에 와서 이제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내 심장을 아프도록 뛰게 하는 새로운 여신을 보았다.


아침지기를 향한 사랑이 시작되면서, 더 빠르게 마음이 열리고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 이후에도 내가 전에 심심풀이로 작곡했던 노래들을 발표하고, 내 재능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즐겁게 지냈다. 마지막 시간에 프로그램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한동안 아파서 꿈이 없었는데,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런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마치고 옹달샘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옹달샘에서 내려오기 전 내 마음에 이미 아침지기가 들어왔다. 


그 이후에도 옹달샘과 인연을 맺어 왔다. 옹달샘에서 나의 자작곡을 발표하고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내게 옹달샘에서 명상치유 프로그램 기간에 최초로 지은 곡은 따로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다
깊은 산속 옹달샘 옆
매트 깔고 요가하는
선녀님을 난 보았네

인기척에 하늘 선녀
깜놀하여 날아갈까
길을 찾는 토끼 시늉
바위 뒤로 난 토꼈네, 토!


전체 모임이 아니라 소그룹 모임에서 발표했다. 우리끼리 산행을 하면서 발표했기 때문에, 밖으로 그 시가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시에 의미를 아는 눈이 밝은 참가자들이 있었지만, 그 당시 아파서 빛을 잃은 내가 빛나던 아침지기에 비하여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냥 듣고 다들 흘려버렸다. 보통 이런 노래를 살짝 흘리면, 무책임한 묻지마 사랑의 짝대기를 놓아주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다. 빛 잃은 나와 빛 나는 아침지기 사이에는 일종의 신분적 계급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사랑의 짝대기를 놓지 않았다.


2주의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갔다. 그때 그냥 잊고 내 삶을 살아야 했다. 이미 나는 아침지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1달간 청년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옹달샘에 올라갔다. 1달 동안 자원하여 옹달샘의 노예가 되었다. 무상으로 명상센터에서 봉사하는 것이지만, 봉사자 입장에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자원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불이나 옷을 빨아 말려 개고 정리하는 등, 명상센터의 잡일을 하는 대신에, 옹달샘의 건강하고 맛있는 식사를 매끼 공짜로 제공받았고, 때가 맞으면 명상센터의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저녁에 일과가 끝난 후에는 공기와 경치가 좋은 곳에서 사색에 잠길 수도 있다. 


내가 있을 때는 <빛나는 청년>이라는 청년백수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봉사활동 일을 제외시켜 주고 그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명상센터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한달살기를 하면서, 옹달샘 명상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나는 아침지기와 같은 옹달샘 명상센터에 지내면서, 가까이 지낼 방법을 찾기 위해서 청년 자원봉사에 참석했다. 청년 자원봉사를 통해서 다른 것을 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청년 자원봉사가 끝나고 그해 가을 옹달샘에서 주관하는 동유럽 지중해 명상치유 15박 16일 여행에 695만 원의 고액의 참가비를 내고 다녀왔다. 아침지기가 여행팀 부팀장이었다는 이유로, 아침지기가 그 여행에 스태프로 가는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동유럽 지중해 여행에 참가 등록을 하고 돈을 냈다. 아침지기는 그해 옹달샘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 여행에 스태프로 가게 되어 있어, 그해 동유럽 지중해 여행에는 안 갔다. 그것을 알았었더라면 동유럽 지중해 대신 옹달샘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갔을 것이다. 이미 신청하고 돈을 냈으니 그냥 갔다. 동유럽 지중해를 가지 않았다고 해서, 산티아고를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든 일이 하나하나의 개별적 사건이 연이어서 일어나 일이 되는 것이지, 격차를 두고 일어나면 역사로 이어지지 못한다. 2주 녹색 뇌 프로젝트에 왔다가, 1개월 청년 자원봉사 왔다가, 빛나는 청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바로 틈 없이 동유럽 지중해 여행을 연달아 갔으니, 그해 이른 봄부터 한여름까지 옹달샘과 인연을 지속해서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동유럽 지중해 여행을 가지 않았었더라면, 청년 자원봉사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다른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인생이란 게 그렇다.


옹달샘에서 청년 자원봉사를 하고, 빛나는 청년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옹달샘에서 만든 두 곡의 자작곡이 빵 터져서 옹달샘 스타가 되었다. 첫 곡은 옹달샘의 고도원 이사장님의 생신파티 때였다. 내가 시와 자작곡으로 그전에 옹달샘 시인이 되어 히트를 쳤기 때문에, 고도원 이사장님 생신파티 때, 내 비록 청년 자원봉사자로서 일종의 노예신분이었지만, 전에 불렀던 나의 자작곡을 시킬 것 같았다. 같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는 않아서, 그 파티에 부를 새로운 자작곡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옹달샘 마당에서 파리 두 마리가 겹쳐 있는 것을 보았다. 영감이 떠올랐다. 고도원 이사장님 생신파티에서 사회자가 나에게 노래를 시켰을 때는, 이전에 내가 만들었던 자작곡을 불러 보라는 의미였지, 새 자작곡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무대에 올라서, "오늘 이사장님 파티를 위해 새로 지은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 불러도 될까요?"하고 이사장님 생신파티에 모인 100명 가까운 옹달샘 식구들에게 말씀드렸더니, 모두 좋다고 박수를 치셨다.


파리도 사랑을 하는데 파리 파리 
파리도 사랑을 하는데 파리 파리 
엉덩이 큰 파리 위에 파리한 파리 올라앉아
파리 파리 파리도 사랑을 하는데 파리 파리


대박이었다. 뒤집어졌다. 딱 한 번만 들어도 기억할 수 있는 중독성 있는 곡이었다. 한 동안 모든 옹달샘 식구들이 그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옹달샘 아침지기의 자녀인 옹달샘의 아이들도 한 번 들은 그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고도원 작가님도 좋아하셨다. 아침지기 그녀도 이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것을 나는 보고 들었다. 내가 자신을 생각하며 지은 노래라는 것을 모른 채 그녀도 이 노래를 불렀다. 


하이얀 명상복에
노오란 잠바떼기
만 입어도 왜 그리 예쁘니
하 도대체 넌 정체가 뭐니


빛나는 청년 프로그램에서는 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이 또한 빵 터졌다. 이 때는 내가 소모임에서 사연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미 내 마음을 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팀원 외에는 이 노래가 의미하는 내용을 몰랐다. 팀원 가운데서도 그 대상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팀장인 아침지기 외에는 그 시점에는 없었다. 내가 옹달샘을 떠난 후에는 옹달샘 가족 모두가 알게 되었겠지만 말이다. 이 노래 또한 가사를 읽어 보는 것보다, 한 번 들어보면 다 넘어간다. 중독성이 강한 짧은 후크송이기 때문에 한 번만 들어도 따라 부르고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악보를 그리지는 못하지만, 나에게는 작사 작곡 싱어송라이팅에 재능이 있다. 지금 나이에 그 잠재된 능력을 키우기 늦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노력을 하기에는 내 평생에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어 바빠서 못한다.


자원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아침지기에게 시집 한 권을 선물하면서, 그 안에 편지 하나를 넣어 주었다. 아침지기는 나에게 고맙다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 주었고, 카페 안에서 시집을 펼쳐서 시집 가운데 몇 편을 내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아침지기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 시집은 광수생각의 만화가 박광수가 유명 시인들의 시들을 엮어 자신의 그림과 함께 단상을 남긴 시모음집이었다. 시를 모으고 선택한 것은 출판사 편집부의 기획이고, 광수생각의 박광수가 그림을 그리고 코멘트만 달았을지도 모른다. 실제 출판은 그런 식으로 하기도 한다. 아침지기는 내 편지를 읽어보고, 그날 오후에는 좋은 오빠 동생 하자고 그러자고 했다. 그다음 날 아침 옹달샘 카페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은 처음 보면 인연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데, 나는 좋은 사람이지만 자신의 인연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여기서 단정 짓지 말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살면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고 했다. 지금 모든 가능성을 닫아 놓지 말자고 했다. 언젠가 인연이 될 수도 있으니 결말을 열어 놓자고 했다. 


이때 나의 대응은 좋았다. 아침지기도 알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때 이미 내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그래서 아주 잠깐 질척되었다. 멋지게 돌아서고 가능성을 오픈해두면 미래가 있지만, 한 번 질척되면 그것으로 끝난다. 동유럽 지중해 15박 16일 여행을 갔는데, 나에게는 매우 좋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열심히 많은 것을 남기며 많은 것을 얻어 돌아온 여행은 아니었다. 695만 원이나 주고 간 15박 16일 초호화 동유럽 지중해 여행에서, 나는 동네 마실 다니듯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고, 쉬엄쉬엄 구경하고 다녔다. 어쩌면 그런 여행은 평생에 한 번일지도 모를 나는 나는 당연히 한 걸음 한 걸음 돈으로 생각하며 의미가 있는 여행을 만들었어야 했다. 전투적으로 사진을 찍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행을 같이 간 사람들과 끈끈한 네트워크를 맺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책으로 엮고 묶어야 했다.


지금은 아침지기도 결혼했고, 나도 결혼했다. 결혼 후 자서전 쓰기 워크숍이 있어 옹달샘에 갔다가 옹달샘 마당에서 잠깐 마주쳤다. 서로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안부를 나누었다. 코로나 때문에도 그렇지만 예전처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감 포옹을 할 사이는 아니었다. 1미터 떨어져서 웃으며 서로 아무 일도 없었듯이 반갑게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했다. 시간이 흘렀고, 결혼을 했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예전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아내 에미마가 훨씬 더 예뻤다. 서로 자신의 짝과 인연을 만나서 잘 살고 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침지기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지 않고, 아침지기를 생각하며 옹달샘에서 만든 자작곡을 계속 발표할 것이다. 누구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라는 것을 누구에도 말하지 않고 말이다. 주변에서 누군가 눈치를 채겠지만 내 입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동유럽 지중해 여행을 다녀와서, 계속해서 옹달샘에 남아 청년 자원봉사를 계속하다가, 옹달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아침지기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옹달샘에서 자원봉사나 알바나 아침지기로 있으면서, 일과 후 개인 시간에 에세이집이나 시집을 써서, 고도원 작가님의 추천과 조언을 받아서 고도원 작가님과 관련된 출판사에서, 옹달샘 시인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고도원 명상센터 깊은산속옹달샘에서 글 쓰는 작가인 아침지기가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아침지기가 나에게 '작가님, 사인 좀 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의 시집과 에세이집의 이야기의 대상이 당신이었다고 그때 고백했을 것이다. 여기서 반전이 있는데, 만약에 그렇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서 아침지기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내가 더 이상 아침지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상형인 배우 한효주와 만날 수 있는 선을 만들어, 카페 폴 바셋에서 룽고 커피와 에그 타르트를 먹고, CGV 한 관을 통째로 빌려 영화를 보고,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으로 향하는 밤기차 객실 하나를 빌려 새벽에 정동진에 가서 동이 트는 것을 보고, 정동진 바다 근처 동산에 올라가 있는 썬크루즈 호텔 스카이라운지 360 회전 카페에 올라가 동해 바다 전망을 함께 보며 서로의 인생의 미래 전망을 함께 나누었을 것이다. 내 인생이 그렇게 성공했었더라면, 최고의 사랑 에미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악이었던 과거가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아내와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사랑의 열매 사랑이(태명)와 함께하는 미래는 찬란할 것이다.


깊은산속옹달샘에 대하여 그렇고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사랑 나의 아내 에미마를 만나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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