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다함 Feb 06. 2021

1학년 여선생이 예뻤다

2012년 여름 13년 반 만에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2013년 초등학교에서 영어회화전문강사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 1년 동안 근무했던 학교는 과거에는 잘 나갔찬란했던 학교였다. 내가 근무할 는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는 작은 학교였지만, 과거에는 학생 수도 학급 수도 많았다. 그 지역의 금수저들이 다니던 학교라 승진보다 촌지에 관심 있던 선생님들이  학교에 오려고 줄을 섰었다는 한. 아주 오래전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김영란 법으로 선생님께 음료수 한 잔 사드릴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받는 선생님도 주는 학부모도 이젠 없다.




처음 근무했던 학교에는 원어민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중학교 때 캐나다로 이민 간 교포였다. 말이 원어민이지 캐나다 국적의 한국인이었다. 한국말을 한국사람처럼 잘할 뿐 아니라 정서도 한국사람이었다. 원어민 선생님은 사전에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셨기도 했지만, 이미 수년 동안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시면서, 대본처럼 쓴 수업계획서 노트를 가지고 계셨다. 수업 준비가 이미 되어 있으셨기 때문에, 큰 노력 없이도 수업을 하실 수 있었다. 출퇴근 시간은 같았지만 원어민 선생님은 영어수업만 하면 되었지만, 나는 학교의 각종 영어과 관련 행정업무까지 했다. 캐나다에서 오래 사셔서 그런지 배려와 선의의 오지랖은 없으셨다. 신입교사가 옆에서 때로는 헤매고 있으면 수업계획서 노트를 참고하라고 한 번 보여주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인색하고 이기적인 분이었다기보다, 나를 동생처럼 본인이 나의 직장 사수처럼 생각하셔서, 영어교사로서 스스로 성장해 보라고 독하게 트레이닝시키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디서 좋은 자료 가져와 수업을 하면 날름 가져가 드셨다. 고지식한 성격이었던 나는 자료 좀 공유해주실 수 없는지 부탁도 못 했다. 내가 특별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으니,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어민 교사의 관리자가 되어야 하는데, 원어민 선생님이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계셨다.


그럼 나는 항상 그분을 신사적으로 대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나 또한 원어민 선생님에 대하여 일종의 사내정치를 하며 견제하기도 했다. 교장선생님과 단독으로 대면하여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영어과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어민 교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원어민 선생님이 실력과 경력 있으셔서 잘 가르치시는데,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불같이 화를 내고 무서우셔서 아이들의 학습심리를 위축시키고, 한국어 교사인 나와 합을 맞추지 않고 단독적으로 하시는 부분이 있어, 원어민 교사 관리에 애로사항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원어민 선생님과의 사이를 중재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음 해 원어민 교사 재계약 때 검토해 보시라는 뜻이었다. 교장 선생님을 통하여 원어민 선생님을 학교에서 내보내려는 시도였다. 두 번도 아니고 딱 한 번 일회적으로 그런 시도를 했었다.


결정적인 실수였다. 세상의 모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직장에서 보스에게 혼자만 알고 계시라고 한 이야기는, 절대 그분에 귀에서 머물지 않다. 교장선생님께 드린 말씀이 바로 다음날 원어민 선생님께 전달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원어민 선생님께 최 선생과 잘해보라는 뜻이었는데, 원어민 선생님은 자신이 그동안 를 선의로 대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화가 났다. 사과를 하고 나중에 어떻게 봉합을 하기는 했지만, 그 화를 무마하는데 애 많이 먹었다. 내가 그분을 컨트롤할 수도, 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 몫 이상을 잘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신바람 나게 일 하실 수 있도록 지원해 드렸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1주일에 기본 수업시수로 18시간에서 21시간 사이 수업을 해야 했는데 나는 21시간을 꽉 채워했다. 우리가 맡은 수업을 반으로 찢어 가 반 원어민 선생님이 반을 맡아도, 원어민 선생님이 이끄시 수업에도 내가 같이 참여하여 팀티칭을 해야 했다. 원어민 선생님이 수업하실 때 행정업무나 수업 준비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원어민이 수업할 때는 아이들이 영어수업에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아주 작은 학교라 한 학년에 한 반씩 밖에 없어서, 수업계획서 한 장을 여러 반 돌려 쓰지 못하고 한 번 수업하고 버렸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닥치는 업무와 수업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업뿐 아니라 학교의 모든 영어교과 행정을 맡아해야 했다. 수업계획서를 만들고, PPT를 만들고, 학습지를 만들며,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시간에 쫓겨 수업계획서를 라인 바이 라인으로 대본처럼 만들 시간적 심적 여유는 없었다 A4 한 장에 대략의 개요만 짜 놓고 수업을 진행했다. Intro와 Small Talk는 무엇으로 시작하여 동기유발을 하고, 오늘 배울 수업의 주제는 어떻게 제시하고, 오늘의 교과서 진도를 어떻게 수업을 하고, 수업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활동과 게임을 하고, 어떻게 연습하고 평가할지, 마무리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인사하고 끝낼지, 대략의 개요만 적어 놓고 수업을 했다.


원어민 선생님이 잘 가르치시기는 했지만 호랑이처럼 무서웠다면는 말랑말랑해서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고 노래와 놀이를 통해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원어민은 배드 캅이었고, 나는 굿 캅이었다. 


학교에 통기타를 가져다 놓고 내가 직접 기타 반주를 하며 영어 팝송을 부르며 영어로 아이들과 노래하는 것으로 동기 유발하며 영어수업을 시작했다. 교과서 출판사에서 선생님들 참고하라고 교사 지도서가 나온다. 교사 지도서를 참조하여 표현들을 나에 맞게 재미있게 바꾸었다. 영어교사 자료 공유 사이트에서 활동이나 게임 가져다가 첨가하였다. 


다른 초등학교 영어 선생님의 방식으로 수업을 하기보다, 강원대 영어교육과에서 배운 것과 교생실습하면서 배운 대로 수업을 했었더라면, 정치의 계절에 휘말리지 않고 경인교대 TESOL 공부를 열심히 거기서 배운 대로 수업을 했었더라면, 아니면 나만의 스타일로 영어수업을 했었더라면, 좋은 영어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교육감이 바뀌고 정책이 바뀌면서, 작은 학교에는 더 이상 원어민 교사를 두지 않겠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원어민 선생님은 일찌감치 떠나게 되어 다른 학교를 찾게 되었다. 나는 교장 교감 선생님 앞에서 공개 수업을 한 후에, 다음 해 재계약을 하기로 했다. 1년 단위로 4년까지 공개채용 없이 매년 교장선생님의 평가로 재계약 연장을 했다. 4년이 지나면 교육청 사이트를 통하여 공개채용을 새롭게 하지만, 그 학교에서 4년 동안 수업과 업무와 인간관계를 무난히 잘했으면, 더 좋은 스펙과 실력을 가진 지원자가 와도 당연히 근무하던 교사로 가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께 재계약을 결정권이 있다 하더라도,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일 잘하고 있는 교사 대신에 신규 교사를 뽑지는 않는다. 학교장의 재평가 절차를 통해 2년 차 재계약을 하기로 구두합의를 마쳤는데 경기도 교육청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정규 수업시수가 18시간 되지 않는 소규모 학교에는 영어회화 전문강사를 빼겠다는 공문이었다. 창의적 체험 활동, 방과 후 수업, 유치원 영어 놀이 등은 수업 시수로 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영어과 업무 담당자가 나였기 때문에, 를 해고하라는 공문을 받아 위로 결제를 올렸다. 그렇게 해서 나도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둘도 아니고 딱 한 명의 여자가 예뻤다. 학교에는 교사의 행정을 돕는 직원이 있다. 교무실 여직원 선생님이 내 눈에 예뻤인생의 지축과 방향을 흔들었던 운명적인 사랑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사랑은 사랑이었다. 운명적인 사랑과 어긋나기도 하고, 스쳐가는 사랑과 이어져 행복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그분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연애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순간이라도 썸은 아니었을까? 그분에게는 나는 같은 학교 직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설레었다. 나에게는 누군가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 스쳐간 순간의 설렘이었지만 가장 절정의 순간에는 결혼까지 생각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저 사람은 결혼대상으로 어떻겠다 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면 그 사랑의 끝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랑은 곧 결혼이다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이 시작되면 그 사랑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사랑이 찍고 가는 경유지가 결혼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둘이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학교 직원들과 근무시간 후 맥주를 마시러 갔다. 회식 날이었는지, 친한 동료 분들과 한 잔 하러 간 날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난 평소에 술을 즐기지는 않았다. 회식이나 사람들 만나는 자리에서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겼을 뿐이었다. 주당까지는 아니었지만, 회식이나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는 날에는, 잔을 꺾을 때 꺾으면서 끝까지 살아남는 정도의 주량이었다. 그분은 술을 좋아했지만, 술 마실 때마다 취했다. 그날도 많이 취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우리 둘이서만 따로 한 잔 하기로 했다. 아무나 붙잡고 술 한 잔 더 하고 싶었는지, 술의 화학적 작용으로 내가 평소와는 좀 다르게 보였는지는 모른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세 잔 되어 어떻게 끝이 날지 몰랐기 때문에, ATM에 가서 뽑을 수 있는 모든 돈을 뽑았다. 월급날 근처였던지 통장에 돈이 많았다. 카드로 긁으면 되는데 왜 ATM에서 돈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동료들과 1차로 마신 데서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다가, 그분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그분 집 근처로 가자 하고 택시를 태웠다. 인연이 아닌 사람과의 한 잔이었다면 행운이었고, 인연이었던 사람과의 한 잔이었다면 실수였다. 택시를 함께 타고 그분 사는 동네로 갔다. 그분 동네 호프집에서 한 잔 하려 하다가, 바로 그분의 집 앞으로 갔다. 술에 취해 아스팔트가 이마까지 올라오는 사람과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분이 아파트까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 후에도 총 세 번 택시를 같이 타고 집까지 보내 주었다. 그런 나를 반기는 날도 있었고, 혼자 갈 수도 있다고 그냥 가라는 날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택시를 같이 타고 그분 집 앞에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비는 내가 냈다.


내 마음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고, 책 한 권 사이에 엽서 한 장 써서 마음을 전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는데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했다. 싫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썼다. 거절도 긍정아무 대답이 없었다. 엽서에는 대답 안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전혀 안 괜찮았다. 그래서 문자를 보냈는데 직장에서 불편하다  답변을 받았다.


거기서 마음을 털어 버렸어야 했다. 아무 말 없이 거기서 물러났어야 했다. 딱 한 개의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이런 모습이 좋았고 설렜다, 잘 살기를 바란다, 고마웠다, 귀찮게 했다면 미안했다 등등의 미사여구로 도배된 장문의 메시지였다. 진심이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중한 장문의 마지막 문자를 쓰는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을 정리하겠다는 정중한 장문의 메시지 뒤에 딱 한 문장의 쌍욕을 날렸다.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 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주변에 말을 전해 들으니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사과할 마음이 있다는 의사를 전했고, 원하면 친한 동료와 함께 카페에서 만나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수 있다는 뜻도 전했다. 그분은 나에게 마음이 완전히 상해서,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었다. 한 동안 아무 말도 없어서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그 일로 내 인생이 끝날 뻔했다. 몇 달이 지난 후 직원 모임 때 직원들끼리 한 마디씩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분은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화가 나서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내 이야기라는 직감이 왔다. 주변 동료를 통해 그분이 하려고 하는 게 뭔가 알아보았더니, 경기도 교육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투서를 올릴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마음이 상하면 어떠한 배상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다. 때로는 그 어떤 배상도 필요 없고,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상대가 진정한 사죄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어려운 문제이다. 다시 장문의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진정으로 좋아했었노라고. 그래서 마음을 전했었노라고. 원하지 않는 거절 의사를 받아들이고 정중하게 메시지 하나 보내고 끝내려고 했었노라고.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정중한 장문의 메시지를 쓴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 씻지 못할 실수를 했었노라고.


운명적인 사랑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짧은 순간 최선을 다하여 그분을 마음으로 사랑했었다. 그때 그 순간의 사랑이었다. 나는 그분께 문자 메시지 하나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고, 그분도 거기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분의 화가 풀렸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사과를 그분이 받음으로 그 사건을 종결했다. 나는 교육청 정책 변경으로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그분도 그 학교를 스스로 떠나 다른 학교로 가셨다. 그분은 학교 구성원 중 그 학교에서 가장 오래 계신 분이었는데, 다른 학교로 가셨다.


전근 가는 선생님 송별 파티 날 노래방에 갔다.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불렀다. 그분을 생각하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고, 가장 그럴듯하게 부르는 노래여서, 내 노래방 18번 곡이었을 뿐이다. 술에 취하신 교감선생님께서 주사를 부리셨다. "사랑했지만"의 가사를 "최 선생이 누구를 사랑했지만"으로 연결하셨다. 학교 모든 선생님과 직원이 나와 그분 간의 엇갈린 사연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마지막 회식 때 그분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는 아니었지만, 모든 감정이 다 정리가 된 후에, 내 마음이 그랬었다는 이야기를 노래로 표현한 셈이 되었다.




새로운 학교를 찾아 원서를 냈다. 두세 군데 학교에서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가 왔다. 어떤 학교에서 를 알고 오라는 데가 있었다. 학교에서 나를 불러준다고 하여도, 경기도 교육청 홈페이지를 통한 공개채용이었기 때문에, 경쟁시험을 보고 합격해야 했다. 학교에서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여도, 나보다 월등이 뛰어난 경쟁자가 있는데 나를 뽑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를 오라고 불러주는 학교에 갔어야 했다. 그 학교 면접을 먼저 보고, 먼저 계약을 확정했었더라면 그 학교에 갔을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지원자가 없어 경쟁자는 없었지만, 내게 사전에 언지를 주지는 않은 채, 모의수업 실연과 면접의 2차전형의 절차를 밟아 나를 채용하려고 했다.  그런 상황을 몰랐던 나는 혹시 떨어질 것에 대비하여 다른 학교에도 보험 삼아 원서를 냈다.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여기도 지원자가 나 하나뿐이어서 경쟁자 없이 나 혼자 시험을 봤다. 보통 서류전형에서 2명으로 좁혀, 2차 전형에서 모의수업을 시켜보고 면접을 한 후에 한 명을 선발하는데, 개학을 앞두고 시기적으로 지원자는 없는데 학교에서는 교사 채용이 급한 시기였다. 최종 면접은 교장 선생님께서 보셨다. 초등학생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미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어 선생님보다 영어를 잘하거나, 학원을 다녀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대안을 제시해 보라고 하셨다. 교육청 장학관 출신으로 유능하셨던 교장선생님의 결론은 당장 영어실력과 티칭 능력을 키우라는 것은 아니었고, 나만의 강점을 살려 승부하라는 뜻이었다. 유능한 보스 밑에서 일하면, 유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장선생님이 직접 일을 배울 수 있는 업무 상 내 사수도 아니고, 직접 만날 기회가 없는 최고관리자인데 말이다. 교장선생님께서는 몇 안 되는 남자 선생님들을 퇴근 후에 부르셔서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셔서, 교장선생님을 따라서 여기저기 다니기도 했다.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이나 영어교육에 관심이 많으셨기 때문에, 학교 영어교육에 대하여 논의를 하기 위해 영어과 담당자인 나를 부르시기도 했지만, 중간의 부장님이나 결제라인을 통해 보고를 올렸기 때문에 교장선생님을 직접 뵐 일은 많지 않았다.


영어 수업과 영어교과 행정 외에도 친목회 총무를 맡았다. 남자 선생님들이 몇 되지도 않았고, 일이 많은 주임 선생님이 맡을 수도 없고, 바로 임용고사 합격한 새파랗게 어린 신규교사를 시킬 수도 없었다. 영어회화전문강사라는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정규직 영어교사였던 내가 친목회 총무를 맡게 되었다. 회식 장소를 잡아 회식장소를 알리고 직원들의 친목 분위기 띄우는 그런 일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친목회에서 직원 여행을 갔다. 여행 장소를 잡고, 친목회 회장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과 함께 사전 답사를 했다. 


공개수업 때 학부모 한 분의 민원으로 한 번 곤혹을 치른 것 외에는 큰 물의 없이 학교생활을 했다. 동료 선생님들이 다들 착하셔서, 직접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으셔서, 나의 부족함을 말씀을 안 하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소속된 6학년 주임 선생님께는 내가 종종 곤란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주임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고 형님처럼 인격적으로 잘해 주셨다. 어떤 부분은 무난히 하고 있었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불안했던 내가, 학년 주임 선생님께는 본인의 업무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에, 대놓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셨을지도 모른다. 중요하지 않은 업무는 잘했는데, 중요한 업무를 잘 못했다. 교장선생님이나 다른 동료 선생님은 나 때문에 어려울 게 없었지만, 주임 선생님께는 관심을 가져야 할 팀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친목회 회장 선생님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형님 같은 분이셨다. 처음에는 나를 대놓고 경계하셨다. 초등학교 일반 선생님들께는 영어회화 전문 강사라는 존재가 불편한 존재이다. 임용고사 TO를 늘려 정규직 교사를 더 뽑아 영어 잘하는 젊은 교사를 영어전담교사로 쓰면 되는데, 영전강이 그 자리에 생각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생님은 내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분은 솔직한 분이셔서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마음에 드셨는지 친동생처럼 대해 주셨다. 나의 부족함을 아시면서 누구보다도 나를 아껴주시고 도와주셨다. 처음에는 나의 영어실력을 시험해 보시면서 초등학교 선생님과 본인의 영어실력이 나보다 못지않음을 보여주시려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처음부터 나 영어 잘 못하는 영어 선생님인데 학교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겸손한 스탠스로 나갔다. 친목회 회장 선생님은 나의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1학년 여선생님 한 분이 치명적으로 예쁘고 착했다. 이거는 완전 반칙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김태희가 농사를 지으며 밭을 갈고 있다는데, 모델을 해도 될 분이 교대를 졸업하여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계셨다. 착하고, 예쁘고, 일도 잘하고, 능력 있고, 옷도 잘 입었다. 그리고 나이도 어렸다. 8살 연하였다. 그런 분이 당연히 나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현실에서는 사랑에 국경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랑은 3개월 만에 끝났지만, 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전에 여러 번 짝사랑을 거치면서 이미 상사병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 첫사랑 소녀를 향한 짝사랑은 유통기한이 7년이었고, 두 번째 아리따운꽃은 3년이었다. 세 번째 사랑 배우 한효주에 대한 사랑의 기간은 끝없이 길었지만,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거나 그립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6월에 학교 친목회에서 1박 2일 직원 여행을 가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는데, 그때 1학년 여선생에게 고백해야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했던 고백 타이밍은 빗나갔다. 둘만의 여행도 아니고 전 직원이 같이 간 직원 여행에서 당연히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그분이 내 마음을 알지만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항상 정답은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내 삶에 충실해야 했다. 가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았어야 했다. 1학년 선생님 반은 1층 이쪽 끝에 있었고, 내가 있던 영어실은 꼭대기 층인 5층 저쪽 끝에 있었다. 그분은 1학년 소속, 나는 6학년 소속이었다. 동선 자체가 만날 수 없는 구조였다. 가까운 곳에 인연으로 맺어질 수 있는 다른 분이 계셨는지도 모른다. 바로 옆 교실에 영어전담 여선생님이 계셨다. 학교 영어 수업은 그분과 내가 둘이서 나누어했지만, 그분은 영어수업을 했지만 맡은 학교 업무는 다른 영역이었다. 학교의 모든 영어교과 업무는 내가 담당하였다. 사람에 대하여 비교할 수 없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1학년 선생님보다 가까운 곳에 계셨던 옆 교실 선생님이 더 예쁘고 착했을지도 모른다. 1학년 선생님에게 마음이 가기 전 그분을 보았더라면 그분에게 꽂혔을지도 모른다. 그분이 나를 잘 알기 전 들이댔더라면 그분도 도망갔을 것이다. 내 사랑의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사랑이 찾아오면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내 갈길 가면서 상대의 곁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서로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때까지 잘해 줄 필요도 없었다. 사랑이 찾아오면 그 사랑에게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내 일을 열심히 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다 다른 여자가 예뻐 보이고 사랑이 옮아갈 수 있는 결말을 열어 두고 말이다.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항상 죽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다. 내가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인 죽음의 형태는 비명횡사였다. 짐승처럼 돌진하는 덤프트럭과 한 순간의 키스로 세상을 떠나는 그런 형태의 죽음이 나의 로망이었다. 벽에 똥칠하지 않고, 고통 속에 비명 지르지 않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 모른 채, 순간 기억이 소멸되어, 심장이 멈추고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오기를 소망했다. 매일매일 죽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 계획을 실천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분을 사랑했지만 그분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분이 내 마음을 아는데, 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예 고백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 사랑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끝냈다.


1학년 여선생을 그리워하는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이 내 책상에 쌓여 있었다. 내일 당장 수업을 해야 하는데 수업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손까딱할 힘 조차 없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학교에 전화해서 그 주의 남은 며칠 연차 써서 병가 내고, 마음을 추스르고 주말 보내고 다음 주부터 출근하면 되었다. 빼먹은 수업을 보강하고 한동안 내 책상에 쌓인 일과 서류를 처리하며 다른 생각하지 말고 눈썹 휘날리며 바쁘게 살았어야 했다. 모질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도 실패하고 출근하지 않고 자취방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께서 학교로부터 내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으시고 자취방에 찾아오셔서 응급실로 데리고 가셨다. 학교를 그만두었다. 바로 병원에 입원하지는 않았다. 조증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판단해서, 부모님은 그냥 집에서 쉬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극단적인 선택을 수도 없이 생각하는 것과,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실행한 것은 다르다. 실패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실제로 실행했다면 바로 병원으로 가서 상담해 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에서 쉬다가 어떠한 계기가 있어 어차피 집에서 쉬는데 마지막으로 약을 끊어 보기로 했다. 약 없이 조울증을 극복해 보려고 시도를 했다. 얼마 동안은 정신이 맑아지고 그분도 좋아졌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조울증이 재발하여 대형사고를 쳤다. 다시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하지 못했다. 동생과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며 소일하며 요양하면서 지냈다. 직장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조울증이 반복적으로 재발해서 취업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직장을 잃고 경력이 단절되니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데도 사회로 복귀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았던 것은 아니다. 가족 일을 도왔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돈을 벌지 못했을 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정치의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