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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4. 2021

아리따운꽃

2000년 군대에서 조울증이 시작되었다. 군입대 시점으로, 3개월도 되지 않아 조울증에 걸렸고, 6개월도 되지 않아 의가사 전역을 하였다. 그 이후 복학과 휴학을 반복했다. 조울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병식이 생기는 것'이다. 병식이란 생긴다는 것은, 내가 조울증 환자라는 것을 깨닫고 알아서 병원에 다니고 약을 타 먹게 되는 것을 말한다. 병식이 아직 생기기 전, '정신과 상담' '약물치료' '규칙적인 생활방식' '자기 관리' 등으로 내 안의 고약한 친구 조울증을 길들여, 나의 기분을 조절하고 관리하기 이전에, 혼자 학교가 있던 타지 춘천에서 생활을 했었던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복학과 휴학을 반복했다. 휴학을 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며 파리바케트 알바를 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나를 춘천 학교로 돌려보내면, 제대로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을까, 졸업은 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다. 그렇다고 한창 청춘의 때에 집에서 놀리며 알바나 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숭실대 전산원에 나를 보내셨다. 전산원에서 학점인정제로 학점을 따면 대학으로 편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강원대 영어교육과 적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강원대 자퇴를 해야 전산원에서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강원대는 그다지 욕심이 나지 않았지만, 영어교육과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학점은 인정받지 않고 학원처럼 다녔다. 전산원 1년 공부도 잘해서 학업성적도 좋았고, 전산원 동기들과 생활도 잘했다. 나와 부모님은 강원대 영어교육과로 돌아가서 전공 공부와 과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 후에도 조울증으로 제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13년 반 만에 겨우 대학 졸업을 하고, 결국 전공을 살리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을 때, 그때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접고 숭실대 전산원을 마치고 숭실대 컴퓨터공학과로 편입하여 졸업했었다면, 지금쯤 스마트폰 어플 개발자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4년 춘천의 학교로 돌아와 복학을 했다. 전산원 생활을 통해 자신감과 대인관계를 회복하고, 병원 다니고 약 먹으면서 조울증을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되어서, 그 후 1~2년 정도는 타지 춘천에서 홀로 스스로를 조절하며 생활할 수 있었다. 2005년 교회를 춘천교대 뒤편에 있는 교회로 옮겼다. 교회 설립 목사님께서 교대 학생을 대상으로 사역하셨던 교회이다. 내가 그 교회에 갔을 때는, 설립 목사님께서 교회를 떠나시고 미국으로 유학 가셨고, 친구 목사님께서 2대 담임 목사님으로 부임하여 오셨을 때였다. 그때 난 더 이상 독실한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던 때는 아니었고, 기독교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 관성적으로 교회 주위를 맴도는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롱 신자였다. 믿음으로 그 교회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교대 여학생을 만나서 사귀려고 교대생 중심으로 사역하는 교회를 찾아갔다. 교대 근처에 다른 대형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간 교회가 가장 많은 숫자의 교대생이 다니는 교회는 아니었다. 교대생의 비율이 절대적이고, 교회 중심 사역이 교대 사역인 교회를 찾아갔다.


교대 뒤편 교회에 갔던 그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청년부 모임의 끝 시간에 앞에 나가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교회 자매님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먼저 인사하며 이름이 좋다고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교대 여학생이었다.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짝사랑이었던 7년의 첫사랑 7년 가운데서도 설렘을 가져다주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교대 여학생이 나의 두 번째 운명이었다. 아직, 이때까지는 외모를 보던 때는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을 보았을 때였다. 나에게 첫사랑의 코드 네임이 '소녀'였다면, 춘천교대 여학생의 이름은 '아리따운꽃'이었다. 아리따운꽃은 대한민국의 오지 중 오지 출신이었다. 우리 또래에는 보기 힘든, 부모님 세대에서나 볼 수 있던, 딸 딸 딸 딸 아들 딸 딸 7남매의 여섯째였다. 초등학교 때 다음 날 중간고사여서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집에서 소를 몰고 꼴을 먹어야 해서 혼자 울었던 기억을 가진 교대생이었다.


예쁜 엽서 한 장 사서, 나의 자작시 <나의 마음에 어느 고을엔>을 손글씨로 정성스레 적어, 친구 하자고 오빠 · 동생 하자고 했다. 나의 손편지에 대하여 그쪽은 구두로 대답했는데, 교회 친구 하는 것 좋다고 했다. 나의 친구 오빠 동생의 의미와 그쪽의 친구 오빠 동생의 의미 사이 정보격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더 내 마음을 들이대지 말고,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교회 오빠로서 좋은 사람으로 곁에 있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리따운꽃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한창 신앙에 불이 붙었던 때였다. 그때 마침 교회에서 특별 새벽기도회 특새가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강원대 근처에서 춘천교대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데, 특새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참여했다.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갔던 것이 아니라, 특새에 참여하던 아리따운꽃과 인연을 만들어 보려는 개수작이었다. 물론, 강원대에서 춘천교대까지 매일 그 거리를 걸어 다녔던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강원대까지 스타렉스 봉고차로 차량 운행을 해주었다.


아리따운꽃은 올곧은 친구였다. 내가 마음을 고백했을 때, '저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제가 존경할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 말은 나에게 마음 없다는 거절의 표현의 그 친구의 버전일 뿐이다. 그다지 존경스럽지 않은 남자 애랑 시시덕 거리는 것을 봤다. 남녀 간에 불꽃은 이성적인 이유에서 계산기 두드려 보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유와 맥락 없이 상대에게 끌리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물론 그 설렘이란 게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라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밝은 교회당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 상대가 아닌, 좁고 컴컴한 뒷골목에서 '오빠, 떡볶이 먹고 갈래요?'하고 싶은 상대에 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 고마운데요. 오빠는 참 좋으신 분인데요. 저에게 오빠는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아서요. 그냥 교회 오빠 동생으로 지내요.' 이러면 될 것을, '저는 제가 예수님처럼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이렇게 나오면 오해가 생긴다. '내가 그런 존경할 만한 남자가 되면 안 될까?' 그런 오해와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차라리 '오빠는 좋은 사람이지만, 저에게 남자가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저보다 더 좋은 분 만날 거예요.'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당신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면 되지, '저는 존경할만한 남자' 타령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차피 사랑이란 존경할 만한 상대와 사귈 거라고 다짐해 놓고, 시시껄렁한 상대와 엮이는 것이기도 하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랑에 눈이 멀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나의 인생 띵곡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리따운꽃을 사랑하고 거절당했을 때, 조울증이 재발했고 조증의 주요 증상인 과대망상이 찾아왔다아리따운꽃은 서태지 광팬이었다. 아마도, 아리따운꽃의 이상형 '존경할 만한 남자'는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서태지'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돌아가신 큰 이모부의 절친이 서태지 아버지였다. 이모부 절친이 서태지의 아버지라고 해서, 내가 서태지와 연이 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대형 프로젝트를 서태지랑 콜라보하여 대한민국과 세계를 놀라게 하고, 서태지와 형·동생 사이가 되겠다는 과대망상이 조증 증상으로 나를 찾아왔다. 아리따운꽃과 서태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아리따운꽃이 서태지 광팬이니, 스타와 팬으로서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서태지와 아리따운꽃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 곁에서 아리따운꽃의 미소를 바라보고 싶었다.


아리따운꽃에게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을 했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는 나의 마음은, 그게 꼭 사귀거나 결혼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널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을 했을 뿐이고, 너의 곁에서 너의 행복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네 곁에 있고 싶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런 바람은 연애나 결혼인데, 나는 바람은 연애나 결혼이 아니었다. 그건 네가 날 사랑하고 난 그 이후에 이야기고, '내가 널 사랑한다.'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썸을 타자거나, 사귀자거나, 연애를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 오빠 동생이어도 상관없었다. 다만, 난 널 사랑하는 교회 오빠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드라마라면 아름답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현실 속에서 누가 날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싹할 수도 있는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마인드였다. '사귈래?'라고 말해서 '싫어.' 하면 '오케이'하고 쿨하게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건강한 마인드이다. 세상은 넓고 예쁘고 착한 여자가 많지는 않지만 가뭄에 콩 나듯 있기는 하다.


아리따운꽃을 사랑하며 또 다른 조증 과대망상이 찾아왔다. 대한민국의 오지인 아리따운꽃의 부모님이 사는 아리따운꽃의 고향 마을에, <아리따운꽃 더불어 숲>이라는 숲을 만들어 글로벌 생태관광단지로 조성하는 것이었다. 조울증의 과대망상도 환자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다른데, 나의 과대망상은 종교적이기보다 정치적이었다. 세상의 슬픔으로부터 사람의 욕구불만으로부터 구원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되고 싶었다. '정치적인 종교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종교적인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여기서 '종교적인'이라는 수식어는, 대한민국을 종교국가로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법과 시스템으로 국민을 사랑하는 국가를 세우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조증 과대망상이라고 할지라도 내 안에 전혀 없는 생각이 나를 찾아오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내 안에 숨은 욕망들이 과대망상으로 깨어나 뒤틀리고 왜곡되어 활동하는 것 같다.


조울증 전에는 내 감정보다 상대방을 존중했다. 조울증이 이후에 병들고 뒤틀린 나는, 날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 적절한 거리를 두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상대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첫사랑의 실패로 상사병과 조울증으로 아팠기 때문에, 다른 여자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날 사랑하지 않는 여자만 골라서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만인이 사랑하는 '만인의 연인' 같은 스타일은 아니다. 어떤 소수의 사람이 나에게서 대단히 매력을 느끼는 그런 스타일이다. 아내 에미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나는 네가 좋다. 사귀고 싶어." 고백하고, 아니라고 하면 "알았어. 안녕!" 하고 쿨하게 돌아서서 내 삶을 살았어야 했다. 오히려 그렇게 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대방의 생각이 바뀌어 나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때는 내 곁에 이미 더 예쁘고 착하고 나를 사랑하는 다른 여자가 있을 수도 있다. 날 사랑하지 않는 상대를 사랑하는데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다. 세상은 넓고 예쁘고 착한 여자는 많지는 않지만, 살다 보면 가뭄에 콩 나듯 있다. 다만,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에게 관심이 없을 뿐이다. 꽁무니를 쫓아다니기보다, 나의 삶의 매력을 발산하면, 내가 눈이 삐어 사랑했던 여자보다 더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를 사랑하기도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자와 사랑에 목숨 걸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내 갈 길을 가고 내 삶을 살다 보면, 내가 궁금한 예쁘고 착한 여자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꼭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가 날 사랑할 필요도 없고, 모든 여자가 날 사랑할 필요도 없고, 세상의 한 여자만 날 사랑하면 된다. 과거를 후회한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과거가 후회되지도 않는다. 상사병과 조울증으로 2030 청춘을 잃어버렸지만, 사랑의 끝에서 아내 에미마와 만났고, 우리들의 사랑으로 아기 요한이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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