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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함 Oct 24. 2021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을 사랑했었다

고2 때 시작된 첫사랑 소녀가 내 마음을 떠나기까지 7년이 걸렸고, 두 번째 사랑 아리따운꽃이 내 마음을 떠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가수 하림의『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노래가 있다. 환승 이별이라는 말도 있는데, 한 사람을 사랑하다가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아리따운꽃을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는데 3년이 걸렸다지만, 주일에 교회에서 멀찍이 서나 볼 수 있었던 것조차 처음 1년뿐이었다. 아리따운꽃은 졸업하고 학교와 교회가 있던 춘천을 떠났다. 2005년 시작된 아리따운꽃을 향한 짝사랑은 2008년도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지만, 아직 아리따운꽃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던 2006년 새로운 사랑이 오버랩되며 시작되어 천천히 아리따운꽃을 잊어갔다. 여전히 아리따운꽃을 사랑했지만, 사귄 것도 아니었고, 더 이상 볼 수도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사랑이 아리따운꽃을 바로 덮지 못했던 것은, 새로 시작된 사랑이 아주 먼 곳에 범접할 수 없는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세 번째 운명이었던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은 여배우 한효주였다. 당연히 짝사랑이었다. 여신은 나에게 연예인이 아니라 여자였다. 한효주 이전의 사랑은 마음의 중심만 보았다. 한효주 이후의 사랑은 '예쁘고 착한 여자'였다. 세상에 예쁘고 착한 여자는 첫사랑이 상사병이 되고, 상사병이 조울증이 되어 인생이 너덜너덜해진 남자를 대신 BMW 탄 재벌 실장님을 사랑할지도 모른다.


일찍이 글쓰기 책 쓰기가 꿈이 되어 대한민국에 이름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었더라면, 여신이 날 찾아올 수 있는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여신과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여신과 스타벅스 빌딩 상층부의 CGV 한 관을 통으로 빌려 영화 한 편 보고, 여신과 정동진 해돋이 열차 막차 한 칸을 통으로 빌려 타고 정동진 해돋이를 보고, 여신과 언덕 위 썬크루즈 리조트의 회전하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동해바다 저 너머를 함께 보았을지도 모른다.


한효주 이후 나의 이상형은 '예쁘고 착한 여자'가 되었다내 눈에는 오직 '예쁘고 착한 여자'만 들어왔고, '예쁘고 착한 여자'는 나를 사랑할 리가 없었다. 아내 에미마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한효주처럼 예쁘고 착한 이미지의 여자가 나의 이상형이었다기보다, 어느 날 TV 드라마에서 처음 본 여배우가 내 이상형이었고, 그 여배우의 이름이 한효주였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연예인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떤 연예인의 팬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서태지도, HOT도, 핑클도, 전지현도, 송혜교도, 김태희도 나의 관심 밖이었다. 크리스천 뮤직인 CCM과 CCM 가수를 좋아했다.


대학교에 온 나는 신앙인에서 세속인이 되었다. 술을 마시고 대중가요를 들었다. CCM은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1999년 대학교 새내기 때, 당시 최신가요를 좋아했었던 것도 아니다. 김광석, 유재하, 윤종신, 이승철, 이문세, 신승훈, 이소라 등의 '흘러간' 노래까지는 아니지만, '흘러가고 있는' 노래를 좋아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야 아이유, BTS, 버스커버스커 등 젊은 가수들의 젊은 노래도 듣는다. 노래를 접하는 방식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주로 자취방에서 이소라 유희열 윤도현 등이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음악을 접했고, 지금은 VIBE나 멜론 또는 YouTube Music 같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의 Top 100이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노래를 주로 듣기 때문이다.


여신 한효주를 알기 전, 굳이 팬으로서 좋아했던 여자 연예인이 있었다면 노영심이었다. 이화여대 피아노과에서 클래식을 전공하고, 변진섭과 같이 활동을 하기도 했던 피아니스트 겸 가수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노영심의 <이야기 피아노> 공연을 보기 위해 내 돈 주고 티켓을 사서 갔다. 같은 과 여자 친구들과 같이 가고 싶었지만노영심 콘서트를 무료 초대권을 주어도 춘천에서 서울까지 보러 갈 사람이 없을 텐데, 돈 내고 갈 또래는 없었다. 서태지 HOT 소녀시대 원더걸스 등의 콘서트도 아니고 말이다.


노영심은 나보다 13년 연상이다. 내 나이 스무 살 때 13살 연상이면 한창 꽃피는 아름다운 나이였다. 노영심이 부른 노래 중 《그리움만 쌓이네》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다. 노영심이 변진섭의 《희망사항》의 작사가 작곡자이기도 하다. 《희망사항》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이런 가사의 노래였다. 그 시대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던 유행가였다. 변진섭이랑 같이 다녀서 둘이 연인 또는 부부 사이로 오해받기도 했다는데, 그런 사이는 전혀 아니었다고 한다.


2006년 아리따운꽃과 오버랩 교차하여 한효주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한효주가 KBS 드라마《봄의 왈츠》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했을 때, TV 스크린을 통하여 처음 한효주를 보았는데 나의 이상형이었다미스 빙그레로 데뷔하여, 논스톱 5에 단역으로 나왔다가 주목을 받고 고정 출연으로 눌러앉았고, 영화 투사부일체에 존재감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었는, 그때는 몰랐다. 드라마 《봄의 왈츠》에서 처음 한효주를 보았다. 《봄의 왈츠》는 윤석호 PD의 사계절 시리즈 《겨울연가》 《가을동화》 《여름향기》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국내에서는 시청률이 저조했던 망작이었지만, 해외 8개국에 판권을 선판매하여 윤석호 PD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내 시청률만으로는 망작이었지만, 나에게는 인생 드라마였고, 흥행과는 상관없이 여배우 한효주를 위한 드라마였지 싶다.


아리따운꽃이 교대 뒤편 교회를 떠난 후, 나 또한 그 교회를 떠나 소양강변의 교회로 옮겼다. 한효주가 이상형이라고 하니, 옮겨간 교회의 청년부 자매님 한 분이 자신이 한효주와 같은 미인대회 출신이라고 연결시켜 줄까 했다. 그 미인대회라면 아마 한효주가 데뷔한 미스 빙그레였을 것이다. 그냥 던진 말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는 모른다. 한효주는 신인이어서 지금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지만, 그때도 이미 내가 넘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이었다. 한효주를 사랑했지만, 팬클럽에 가입하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생일선물을 보내거나, 소속사나 집 근처를 기웃거리거나, 한효주 소속사에 직원으로 입사할 방법을 찾거나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평생 사랑할 단 한 명의 인연을 찾아 끊임없이 수많은 여자에게 직진했던 내가, 유일하게 그 어떤 작업도 걸지 않은 여자는 한효주 하나뿐이었다. 작업을  수 없는 위치였다. 나의 경제적 사회적 카스트가 한효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급이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연을 만들 길을 찾았을 것이다. 여신을 향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사랑처럼 마음이 애타지도 않았다. 그 사랑으로 상사병과 조울증이 재발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니,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을 사랑했었다.


그런데 말이지, 민주주의 시대에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신이 있을까? 시집 한 권 써서 출판해서, '시인 최다함'이라는 명함 하나 파고, 단정하고 깔끔하게 면도하고, 젤로 머리 세우고, 백화점에서 은은하면서 매혹적인 향수를 사서 뿌리고, 출판사를 끼고 여신이 다니는 길에 테이블과 의자를 깔고 앉아 출판기념 사인회를 하고, 여신 한 분을 위한 '사인회'를 해주며 여신에게 뻐꾸기를 날리고, 여신과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실 기회를 만들었더라면, 지금 나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예쁘고 착한 여신 한효주를 향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예쁘고 착하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아내 에미마를 만났고, 우리 아기 요한이를 만났다. 이 정도면 이미 성공한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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