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등산객들로 지하철이 붐빈다. 단풍 구경을 다녀온 사람들, 온몸을 등산복으로 차려입고 산악용 지팡이까지 든 사람들. SNS에는 "오늘도 완등!", "정상 정복!" 같은 게시글이 올라온다. 그들은 몇 시간씩 산을 오르내릴 만큼 튼튼한 다리를 가졌다.
그런데 지하철역에만 오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고작 계단이 마치 에베레스트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바로 옆에서 위잉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도 마찬가지다. 산을 오를 땐 그렇게 거뜬하던 다리가, 역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앞에서만 서면 갑자기 말을 안 듣는다.
그래서 좁디좁은 엘리베이터 앞에 당당하게 줄을 선다.
나는 아내의 전동휠체어와 함께 그 줄 끝에 선다. 나 역시 장애인이지만, 계단은 천천히라도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더 복잡하다. 아내 혼자 여기 남겨두고 먼저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께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아내는 전동휠체어 없이는 이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엘리베이터는 원래부터 여기 있던 게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수많은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다. "이동할 권리"를 외치며 도로에 드러누웠다.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싸워서 만든 공간이다.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존과 직결된 공간이다.
아내에게, 유모차를 민 부모에게, 무거운 캐리어를 끄는 사람에게 엘리베이터는 선택이 아닌 유일한 수단이다. 계단도 못 오르고, 에스컬레이터에도 오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지만 정작 이 공간을 채우는 건 양쪽 다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등산복 입은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선택할 수 있다. 계단도 훌륭한 운동이다. 무릎 건강에도 좋고, 심폐 기능 향상에도 탁월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볍게 올라갈 수도 있다. 건강을 위해 산에 간다던 사람들이, 왜 눈앞의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는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그 멋진 산악용 지팡이는 장식품인가.
"나도 편한 게 좋다", "나도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법적으로는 맞다. 누구나 엘리베이터를 탈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다리를 가진 사람이, 정말 엘리베이터가 절실한 사람 옆에서 먼저 버튼을 누를 때, 그때 양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문이 열린다. 등산 배낭을 멘 아저씨가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다. 배낭에는 카메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나는 아내의 전동휠체어 크기를 가늠한다. 좁은 엘리베이터에 등산객 서너 명이 먼저 타면, 휠체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나는 아내를 본다. 아내도 나를 본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오늘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문이 닫힌다.
그는 오늘 어느 산 정상에서 "가을 단풍 최고!"라고 외쳤을 것이다. 멋진 풍경 사진을 찍으며 "역시 등산이 건강에 최고"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또 산에 갈 것이다. 건강을 위해, 정상을 향해.
그리고 하산길,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리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도 그는 먼저 탈 것이다.
바로 옆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위잉 소리를 낸다. 계단은 오늘도 한산하다.
그런데 문득, 등산복 입은 한 청년이 에스컬레이터로 향한다. 배낭을 다시 메고, 지팡이를 잡고, 움직이는 계단 위에 선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본다.
누군가는 알아가고 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누군가 싸워서 만든 이 공간을, 진짜 필요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