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에서 신부로 진화하는 과정
"결혼하려고 사귀는 거면 딴 여자 만나. 나는 결혼한 생각이 없어" 아직 사귀지도 않은 남자친구에게 제일 먼저 뱉은 말이다. 아직 어리면 혹은 사귄 지 시간이 좀 지났고 결혼 얘기가 오가는 커플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나는 30대 중반에 남자친구와 사귀자는 고백을 이렇게 했다. 교회 친구와 연인의 기로에 서서 둘 다 분명 썸을 타고 있다는 걸 둘 다 느끼고 있었는데, 도무지 고백을 먼저 하지 않는 그가 답답해서 했던 말이다. "나는 너랑 노는 거 재밌고 좋아서 사귀고 싶은데, 우리가 이제 나이도 있고 너도 결혼 생각이 있을 거 같아서. 결혼하려고 사귀는 거면 딴 여자 만나. 나는 결혼한 생각이 없어"라는 어이없고 오만한 고백에 남자친구는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사귀기 시작했다.
20대 초중반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웨딩드레스 입고, 예물로 명품 받고, 남자 친구랑 같이 꾸민 집에서 함께 사는 모습을 처음 볼 때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돌아다닌 적도 있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아닌 결혼의 행위가 하고 싶었다.
그런 설레발도 잠시. 일을 시작하고 나의 삶을 즐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적당한 외모라생각해 중장기 연애를 꾸준히 했고, 자기 일 좋아하는 커리어 우먼이 됐고, 대기업에 다니며 적지 않게 벌면서 내돈내산 하는 삶이 즐거웠다. 굳이 결혼을 해야 하나 싶었다. 20대 끝자락에 29살. 매 주말 친구들의 결혼식이 이어졌다. 그때 다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남자친구도 있었다. '나도 결혼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ㅡ당시 사귀던 X-남자 친구가 참한 사람이었다. 이 남자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남자 친구도 만나지 못 했을 것 같다. 재밌는 게 제일 중요했던 나는 숙맥 같은 착한 남자들보다 소이 연애 좀 해봤다는 남자들과 적당히 밀당하는 도파민 터지는 연애를 즐겼다. 착한 남자를 만나는 게 좋다는 걸 알려준 결혼 해서 아기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도 들은 X-남자 친구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ㅡ 그렇게 결혼에 다시 관심을 가지며 X-남자 친구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준비했지만 결국 가치관의 차이로 첫 결혼 시도는 빠그라졌다. 그렇게 나는 더욱 비혼 주의자가 된 30대를 맞이했다.
처음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얘기했을 때 부모님은 그저 흘러가는 소리인 줄 알았다. 일을 시작하고 나의 삶을 즐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적당한 외모라생각해 중장기 연애를 꾸준히 했고, 자기 일 좋아하는 커리어 우먼이 됐고, 대기업에 다니며 적지 않게 벌면서 내돈내산 하는 삶이 즐거웠다. 굳이 결혼을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점점 변해가는 나의 삶의 패턴, 말, 행동에 나는 엄마가 걱정할 정도의 비혼 됐고 엄마는 내가 나이 들어도 혼자 살 수 있는 준비를 시키기 위해 부동산, 주식 등에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사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꾸려가는 라이프는 더 좋아진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여유가 더 있다 보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자원과 재원이 늘어난다. 친구를 만나서 가성비 호프집을 가는 게 아니라 와인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인터넷으로 옷을 사는 게 아니라 아울렛 가서 옷을 사고, 여행을 가서 비즈니스호텔에서 자다가 특급호텔을 예약하는 그런 여유가 너무 좋았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너무 좋았다. 그러고 나서 남은 돈은 저축, 투자까지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좋은 삶을 왜 결혼이라는 제도에 가두려는지 시간이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쓰는 패턴과 삶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됐고, 결혼해서 평생 같이 살 것도 아닌데 성격이 안 맞으면 어느 정도까지 노력하다가 안되면 헤어지면 됐다. 사랑해서 서로 배려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지지고 볶고 싸우며 서로 노력해도 변함없다면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생각으로 굳이 더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헤어짐은 아프고 슬프지만 '그'보다 사랑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나'를 버리면서까지 남을 사랑해야 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를 지키며 연애를 하다 말다 하던 시기에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남자친구는 같은 교회였지만 워낙 큰 교회라 이름만 들었던 사람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 친구를 아는 모두가 칭찬만 했다. 하도 듣다 보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소개해달라고 하면 다들 하나같이 그랬다. "근데 키가 좀 작아. 너 키 작은 사람 안 만나잖아". 그때마다 그랬다. "아..... 그렇지 안 만나지...." 이렇게 얼굴도 모른 채 넘어갔던 날들이 정말 많다.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그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계속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고 마음에 남는 사람 있잖아. 남자친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궁금한 걸 또 못 참는 나는 그의 소꿉친구 양씨에게 물어봤다. 네 친구 어떤 사람이냐고. 소꿉친구의 연애와 결혼을 간절히 바라고 있던 양씨는 아주 즐거워하며 지금의 남친에 대해 소상히 말해줬다. 자기 색을 강하게 들어내기보다는 잘 받아주는 친구.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20대는 방황했지만 지금은 자기 신앙을 잘 챙기는 친구. 영업직에 있는데 생각보다 영업력이 좋아서 인정받으며 직장 잘 다니고 있고, 운동 좋아해서 자기 관리도 나쁘지 않게 하는 친구. 이제는 제대로 된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져서 다음 연애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이자 좋게 말하면 경제관념이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린고비 같아볼 수 있도 있는 건실한 청년이라고 소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 양씨의 평이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더 궁금해졌던 것 같다. 그 후로 교회 여러 행사를 통해 남자친구를 살피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를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매주 주일 관찰했다. 모르는 사람을 관찰하다 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표정이다. 얼마나 많이 웃는가, 얼마나 많이 찡그리는가 그런 게 가장 먼저 보이는데 남자친구는 더 많이 웃는 쪽이었다. 일단 합격. 다음으로 보이는 건 말투나 행동이다. 멀리서 보면 주변에 하는 행동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는 좀 손해 보더라도 늘 배려하는 쪽이었다. 착하군, 합격. 마지막으로는 말의 내용과 말투다. 모르는 사람인데 어떻게 내용과 말투를 알 수 있나 싶지만, 모르는 사람일 때가 더 쉽다. 군중 속에서 그냥 옆에 서 있는 핸드폰 하는 행인 1. 남의 말을 엿듣기 가장 좋은 포지션이다. 그런데 이 친구의 말투와 언행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스피커가 아닌 리스너였던 남친. 남의 말을 한창을 들어주고 진지하게 건네는 말에 진정성이 있었고, 분위기를 위해 던지는 농담이 웃긴 남자였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만나봐야지 생각할 때 기회가 왔다. 내가 있는 러닝 크루에 남자친구가 왔다. 실제로 알고 지내니 옆에서 몰래 듣던 것보다 더 웃기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색깔이 강한 나를 잘 받아주는 마음 넓은 사람이었다. 이미 그가 좋은 사람이란 파악을 끝낸 상황이라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착하디 착한 남자친구는 긴가민가 하면서 나의 리드에 끌려와 함께 놀았다. 아니 근데 이쯤 되면 사귀자 할 법한데...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는 그에게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먼저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가장 고민 됐던 게 친구 양씨이 말이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 근데 어떡해. 난 결혼할 생각은 없는데. 그래서 전제를 붙이며 고백을 했던 것 같다. "결혼하려고 사귀는 거면 딴 여자 만나. 나는 결혼한 생각이 없어"
나랑 노는 게 재밌어졌는데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의 고백을 승낙한 남자친구는 이후 사귀는 내내 '결혼하자, 결혼하고 싶다, 결혼생각 있냐' 등의 말을 일절 꺼내지도 않았다. 참 그 다운 배려였다. 그런 배려와 실없는 농담과 나의 모든 것을 받아내주는 남자친구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감정과 기분 격차가 확실한 내가 분노의 극에 달하던지, 우울에 깊이 빠져 있던지, 과할 정도로 신나 있던지 간에 이 친구는 몇 마디 안 되는 말과 행동으로 마치 저울에서 0점 조절을 하듯 원래의 나로 돌려놓았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 성격이 많이 죽은 건지도 모르지만, 이 친구와 있으면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친구랑 평생 놀고 싶었고 같이 있다 보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생겼다.
그래서 '얘'랑 결혼이란 게 하고 싶어졌다. 이것도 아주 이기적이지만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 같아서. '나'를 위해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려심 많은 남자친구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너무 잘 배려해줘서 결혼 준비도 내가 먼저 시작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궁금하니까 데이트로 웨딩 박람회를 가자고 신청하고, 결혼식도 진행하는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으며 상담이나 받아볼까 하며 상담을 받고 그렇게 끌고 다니니 눈치를 채더라. 그것도 아주 늦게. 그래도 그의 성격상 눈치챈 게 어딘가 싶다.
집에 남자친구를 처음 인사 시킬 때도 엄마는 밥 먹는 내내 고맙다는 얘기 밖에 하지 않았다. '나는 한다면 하는 애라 진짜 안 갈까 봐 걱정했다며. 고집 세고 드센 애 바꿔줘서 고맙다'며. 그렇게 비혼에서 예비 신부로 나는 진화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