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lody Jan 26. 2023

좋은 마음으로 '더 글로리'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드라마] 넷플릭스 / 주연_송혜교, 임지연

'더 글로리'가 오픈한 2022년 12월 30일. 직장생활 11년 차 중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회사의 새로운 대표 선임, 이해가 안 되는 조직 개편,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한 동료의 승진. 모든 것이 혼란으로 다가오던 시기에 '더 글로리'를 봤다. '더 글로리는' 벚꽃처럼 흩날리던 멘탈을 차분하게 만들었고, 솟구치는 분노를 모두 담아 동은의 복수를 응원했다.


'더 글로리'에서 아무 잘못 없는 동은이가 학교 폭력을 당하는 이유를 연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해도 문제가 없고, 넌 이렇게 해도 문제가 없으니까". 연진은 동을 보고 "사회적 약자"라 말한다. 회사에서 인사의 문제 역시 그렇다. 회사에서 평가를 받는 나는 사회적 약자다. 인터넷에 올라온 Z세대의 퇴사는 조용한 사직부터 할 말 다 하는 당찬 사직까지 여러 모양의 퇴사를 보여준다. Z세대 까지는 아니지만, MZ라고 겨우 묶이는 나도 웬만하면 할 말을 하고 사는 편이라 우리 팀에서 제일 잘 따지는, 쌈닭이라고 해도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이번 인사를 처음 통보받았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이 빨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채 자리에서 돌아와 다시 면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믿고 따르던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해야 할 말을, 확인해야 할 상황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다시 상사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작년 한 해 열심히 일했고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승진에서 밀린 건지 물어본 질문에 상사는 "그것까지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일을 시작한 이래 가장 확실하게 경험했다. 나는 사회적 약자란 사실을.


메시지 성경 시가서 중 욥기에 첫 해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다. '억울한 고난이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고 나서 보상을 기대하며 손을 내밀었다가 느닷없이 뒷통수를 얻어 맞고 비틀 거리며 쫓겨나기도 한다"고. 그야말로 2022년의 마지막의 나는 '억울한 고난'의 '사회적 약자'였다.


억울한 고난을 당하던 동은이는 자퇴를 결심했고, 연진에 대한 최후의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그 화살은 활 시위를 떠나기도 전에 망가지고 만다. 방관자 선생님은 "친구끼리 그. 냥. 한 대 때릴 수도 있는 거고". '그냥' 사실 우리네 대화 속에는 그냥이라는 말을 가장한 많은 말들이 많다고 느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됐어" 어쩌면 이유를 알려줄 수 없는 모든 말이 누군가에게는 '그냥'이 된다.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싶어 면담을 요청을 했을 때 상사에게 물었다. 그래도 수평적 문화 조직 개편으로 모든 직급이 사라졌는데 왜 역행하듯 우리 팀만 팀장이 생기냐고, 팀장이 되는 동료는 휴직을 하지 않았냐고. 그 말에 상사는 나에게 "어쩔 수 없지, 네가 받아들여야지"라고 말했다. 꼭 사회적 약자인 동은이를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 같았다. 면담을 요청했던 이유는 이미 결정난 인사를 엎어 달란 의도가 아니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내가 뭘 잘 못해서 혹은 못해서 조직 전체에 역행하는 인사 구조에도, 작년 인사 평가 대상자가 아니었던 사람에게도 밀리는 건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온 결과는 그저 내가 그냥 결과 할 뿐이었다.


연진과 학교를 떠난 동은이는 연진이를 꿈으로 삼고 차근차근 복수의 칼날을 준비했다. 동은의 모든 준비 과정이 힘겨워 보였고, 안 돼 보였고, 그녀의 복수를 응원하며 시리즈를 봤다. 처음 봤을 때는 동은의 복수가 회사를 향한 나의 복수라도 되는듯 함께 칼춤을 췄다.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았다.


회사 생활 중 가장 좋아했던 회사였고, 가장 근속 연수가 길었던 이번 회사. 받아들이기 힘든 인사 후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일해 보려 했지만, 이미 생겨 버린 배신감은 예전에 회사를 좋아하던 마음으로 돌릴 순 없었다. 회사에 쌓여가는 불만과 팀에서 소외된 것 같은 괴리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무것도 인정 받지 못할 것이란 확신. 이미 억울해지고 피해 의식으로 가득찬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더 글로리'를 틀었다. 나의 억울한 마음을 대신 복수해줄 동은이를 기대하며.


하지만 두 번째 '더 글로리' 는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한치의 우연도 없이 복수를 위해 달려가는 동은이가 다르게 다가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힘겨워 보였고, 불행해 보였다. 동은이 또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생각해보면 끔찍하지 않니? 내 세상이 온통 너라는게. 내 세상이 온통 너인 이유로 앞으로 니 딸이 살아갈 세상은 온통 나겠지. 그 끔직한 원망은 내가 감당할게, 복수의 대가로."라고 말한게 아닐까. 그리고 상상했다. 복수가 끝난 후의 삶. 회사를 향한 원망이 끝난 후의 나의 삶.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동은의 복수를 응원하던 내가 동은을 연민하게 됐고, 회사를 향해 분노하던 나의 마음도 그렇게 멈출 수 있었다. 회사와 상사를 향한 억울함과 분노가 커질수록 나는 스스로를 갉아 먹고 있었다. 좋아하던 일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는 마음, 아무 잘못없는 동료를 미워하게 되는 마음 부정적인 마음이 나를 더 부정적이게 잠식 시켰고, 이 곳에 더 이상 있다가는 내가 망가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히 알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은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이란 사실을. 그렇게 나는 이직을 준비한다. "그 어떤 영광도 없겠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