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집을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면서 수많은 물건과 마주했다. 어렸을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의 물건들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수많은 물건 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빨간 털장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더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하얀 입김이 눈꽃이 되어 내리는 겨울이었다. 정확히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니가 처음으로 나와 둘이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명동으로 향했다. 살짝 오래되고 낡아 보이지만 손맛이 좋아 보이는 음식점에서 김치찌개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 이야기를 많이 하기보다는 언니가 내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집에 가기 전 언니가 나에게 빨간 털장갑을 사주었다. 추운 겨울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이겨내라고 선물로 준 것일까. 지금까지 언니가 나에게 준 것들이 정말 많지만, 언니에게 받은 선물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바로 이 빨간 털장갑이다.
사실 나에게는 띠동갑인 언니가 있다. 서른여섯 살인 언니와 스물네 살인 나. 우리는 열두 살 차이가 나는 같은 호랑이띠이다. 언니는 아주 어린 학창 시절부터 모두가 인정하는 모범생이었다. 엄마 아빠 말씀을 잘 듣고, 공부도 잘했으며, 무엇보다 성실했다. 첫째인 언니는 그만큼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결국 언니는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공부하던 도중 언니는 호주로 잠시 유학을 떠났고, 전공을 살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간호사가 되었다. 그 후로부터 몇 년 후 지금의 형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어여쁜 딸을 낳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단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니의 인생 중 일부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의 인생에는 내가 얼마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언니는 여느 흔한 자매들처럼 자주 놀러 다니지도 못했고, 서로의 옷을 입었다고 싸운적도 없었고, 시시콜콜하게 남자친구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기 때문이다. 친구 같은 자매로 지내기보다는 정말 언니와 동생으로서의 자매 사이로 지내온 것 같다. 언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언니의 어린 시절 또한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언니가 초등학교 가방을 메고 등하교를 하는 모습, 언니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 언니가 대학교 새내기가 된 모습이 그저 희미하게 기억날 뿐이다. 그래서 언니와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 어린 동생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언니는 항상 바빠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언니와 함께 놀고 싶었던 적이 많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나 또한 점점 언니의 나이가 되어가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 차이가 열두 살이 난다는 이유로 항상 어른 같아 보이던 언니가 결코 그때 어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흔한 반찬 투정을 하는 모습, 부모님에게 대드는 모습, 한껏 술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한 모습 등 언니는 나에게 한 번도 자신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커가면서 단단해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내가 아는 언니는 처음부터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른이 되면 그런 거구나. 적어도 열두 살 어린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내가 이십 대 중반인 지금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언니가 나에게 바른 행동만을 보여줄 수 있던 것은 언니가 어른이어서가 아니라, 언니의 성격 덕분이었다는 것을. 바르고, 성실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언니의 모습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서야 이해한다. 집안의 장녀로서, 첫째로서, 나의 언니로서 동생들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줘야 했을지 모르는 언니의 남모를 고충을. 묵묵히 착실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언니를 보고 자란 나 또한 언니가 걸었던 길을 걷고 싶다. 언니의 삶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졌다. 언니는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겠지만, 나는 언니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다음 생에는 내가 언니의 언니로 태어나 동생이었기 때문에 언니에게 주지 못한 많은 것들을 주고 싶다. 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 누구도 언니만큼 대단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단지 나의 언니라는 이유로 언니를 존경했다면, 지금은 한 사람으로서 언니를 존경한다. 이 글을 빌려 언니에게 당당히 말하고 싶다. 언니가 내 인생의 롤모델이라고. 그리고 언니는 충분히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자격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