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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언 May 06. 2020

유가전쟁 : 비합리적 신념

 제발 우리 원유 좀 사주세요 

출처 : 네이버 금융(그래프 기준일 5월 4일)

지난 4월 20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가 배럴당 -$37.63에 거래를 마친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원유 1배럴을 사면 되레 $37를 주겠다는 것이다.

유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1983년 원유선물 거래가 시작된 이후 처음이다. -$37.63이라는 수치 자체도 기록적이지만, 같은 날 장중에는 최저 -$40.32까지 폭락하는 기이한 현상까지 보였다.

도대체 원유시장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유가가 폭락하다 못해 마이너스까지 기록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세계적인 시각으로 원유의 수요와 공급, 그리고 원유 자체가 가진 본연의 특성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Nobody Want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의 원유 수요가 급감했다. 강력한 국내외 이동제한으로 자동차, 항공, 선박 등 연료 소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운송산업이 침체된 데다 코로나 펜데믹(세계적 유행) 공포의 확산으로 가계경제마저 위축됐다.

수출입 의존도가 높은 국내경제의 코로나 타격은 꽤나 직설적이다. 글로벌 수입 수요가 감소한 탓에 국내 주력 수출상품인 반도체, 석유제품, 선박 등의 품목이 모두 수출 마이너스 실적을 기록하며 지난 4월 무역수지가 99개월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사회적 거리두기, 봉쇄정책 등 코로나19를 대처하기 위한 각국의 필사적인 노력이 한참인 가운데, 문화적인 현상이든 강제적인 조치이든 결과적으로 세계는 원유 소비량을 줄였다. 수요가 완벽히 통제된 시장에서 우리의 상식은 원유 생산(공급)량을 줄여 수요를 견인할 최적의 시장가격을 형성하리라 기대했다.

공급을 통제하는 것만큼 수요의 금단현상을 해소하는 손쉬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Chicken Game

도로 양쪽에서 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 이익의 총량은 두 차량이 함께 회피한 경우가 가장 크지만, 둘 중 한 대만 회피하면 피하지 않고 돌진한 차량이 가장 큰 이익을 얻는다. 물론 이익에 눈이 먼 두 차량이 돌진하면 최악의 결과가 발생한다. – 치킨게임

우리의 상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원유를 감산해도 모자랄 판에 미국-러시아-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자존심 싸움이 원유 생산을 부추겼다.

치킨게임의 방아쇠는 러시아가 당겼다. 지난 3월 감산을 논의해야할 OPEC+(OPEC과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 연합체) 회의에서 러시아는 증산을 선언했고, 통수(?)를 맞은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쟁에 질 세라 덩달아 증산을 결정했다. 미국을 견제하고 에너지시장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2000년대 중반 셰일오일 채굴에 성공하면서 세계 최대 에너지 매장량 국가가 됐다. 원유 소비량으로도 세계 1위인 미국이 더 이상 에너지 수입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니 석유를 정치·경제적 무기로 사용하던 기존 산유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생산요소의 비용이다. 셰일의 생산단가는 배럴당 $40, 원유는 $10달 수준이다. 미국의 셰일 업체들이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 유가 $50 선이 유지돼야 한다. 반면, 러시아는 유가를 필사적으로 낮춰 가격경쟁력으로 에너지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실제로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증산 정책으로 유가가 배럴당 $20까지 하락하자 미국 셰일 업체들이 줄도산하기 시작했다. 


Store Fuels

원유의 수요와 공급은 단기에 매우 ‘비탄력적’인 성격을 보인다. 가격 변화에 수요와 공급을 민감하게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요자(항공, 선박 등) 측면에서 유가가 하락했다고 비행기와 선박을 더 많이 운행 수 없는 노릇이다. 공급자(원유생산기업) 입장에서도 중단 및 폐쇄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에 갑자기 생산을 멈추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비탄력성으로 발생하는 초과공급을 완충하기 위해서는 저장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원유의 과잉생산이 오래 지속된 데다 최근 코로나19와 원유전쟁으로 남아도는 원유가 증가해 지상 저장고가 가득 찼다.

실제로 지난달 말 골드만삭스는 세계 원유 저장고 용량이 3~4주면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다못해 바다 위 떠도는 유조선을 빌려 원유 저장고로 활용하고 있으나, 이 마저도 가득 찬 상태다.


Futures

국제유가는 선물계약(Futures)으로 거래된다.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원유(현물)를 사고파는 것이 아닌, 만기 이후 현물을 인도할 권리를 계약하는 페이퍼 거래다. 통상 선물거래에 참여한 매수자(증권사)는 만기가 오기 전에 다른 매수자(증권사 혹은 실제 수요자)에게 페이퍼를 팔아 치우지만, 만기까지 매도하지 못할 경우 꼼짝없이 실물을 인도받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마이너스 유가는 5월물 WTI선물계약이다. 지난달 20일, 5월에 원유(현물)를 인도할 수 있는 권리증서(선물)가 -$37.63에 거래됐다는 것이다.

원인은 5월물 선물의 만기(4월 21일)를 하루 앞둔 상황까지 매수자들이 선물을 처분하지 못한 데 있다. 코로나19로 원유 수요량이 급감(Nobody Want)했고, 원유전쟁(Chicken Game)으로 원유 공급량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쳐났기 때문이다.

만기가 지나 실제로 대량의 원유를 받아도 이를 저장할 공간(Store Fuels)이 없다. 우여곡절 끝에 저장고를 찾는다 하더라도 오를 대로 오른 저장비용과 운송비용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퇴양난에 빠진 매수자들은 매도자에게 웃돈을 쥐어 주면서까지 원유를 팔아 치우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고전경제학은 인간(시장 참여자)을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경제주체로 표현한다. 이번 유가전쟁을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물로 보기에는 불완전하고 위험하며, 출혈 또한 막대하다. 어찌 보면 이익만을 좇아 치킨게임을 벌인 산유국들의 비합리적 신념에 따른 합리성일지 모른다. 승자가 없는 전쟁이라 할지라도 코로나19로 인한 최악의 시장환경을 탓하기에 명분이 충분하지 않은가!




by 데일리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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