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쓰며 사랑하며

내가 수집한 순간이 글이 되어

by 고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 여덟 살 무렵부터였던 것 같아요. 편지에 재미를 들이면서부터요. 방광 가득 소변이 차있는데 빼내지 못해 팽팽하게 부푼 아랫배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쓰지 못하면 병이 나요. 타이핑 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감사히 여기고 미친 듯이 빼내요.

주변이 아무리 개판이어도 상관없어요. 그저 저 앉을자리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몰입이 바로 시작돼요. 언제나 시간이 귀하고 부족하기에, 바로 시작해야 해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오롯이 제 머릿속이 비치는 곳만 불이 들어와요.

"몇 번을 부르는데도 왜 대답을 안 해?"

"꼭 이렇게 와서 한번 툭 쳐야 안다, 그렇지?"

그렇기에 살아오면서 가족, 친구들의 다정한 원성도 많이 들어왔어요.


제 책상은 언제나 그렇듯 아슬아슬하게 무너질 것 같은 책과 수첩의 탑, 덕지덕지 메모가 날리고,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펜과 노트북 닫으면 보이는 엉키고 설킨 전선줄들이 날 것 그대로 살고 있어요. 책상 아랫부분에는 그동안 쌓아둔 오프라인 메모가 수첩 30권 분량으로 쌓여있고, 제대로 된 서랍장 하나 없어 어디 넣어야 할지 몰라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어요. 언제든 추억거리가 필요할 때 꺼내 볼 수 있어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어요.

혼자 써도 좋았어요. 글 쓰는 동안만큼은 오롯이 저로 살 수 있었어요. 글 내용과 글을 쓰는 저와 은밀하게 내통하는 순간이 짜릿했어요. 비밀스럽고 금지된 행위들을 저지를 때 드는 묘한 긴장감과 쾌감 등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마음이 무너져 울고 싶은 순간에도 쓰다 보면 고통이 존귀한 무언가가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어요.


글쓰기 몰입은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감정들을 불러일으켜 어느 날은 몸살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어느 날은 해방감과 쾌감을 선물하기도 했어요. 감정이 꽈악 차서 사람의 몸이 어떤 보이지 않는 것들로 채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돼요. 의식하지 않고 마음에 나오는 것들을 마구 써 내려갈 때면 가끔 머리가 쓰는 것인지, 손이 쓰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심상으로 인해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것을 받아 적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몸이 팽팽하게 가득 찼다 손으로 촤악 빠져나가는 시원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도대체 뭘 하기에 그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손을 움직이다 김이 싹 빠지는 순간이에요. 저는 작가가 아니거든요. 그냥 일기 따위나 꾸준하게 쓰는 주부니까요. 그런 사람이 뭔가를 쓰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다는 사실은 창피한 거잖아요. 늘 무언가 당당하지 못했어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쓰고 있다 한들, 어디 가서 뭐한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소중한 이 하루를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써요. 작가가 아니지만 누군가 알아주는 것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내가 죽고 없어질 나중의 세상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단 한순간이라도 생생하게 선물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전지적 엄마 시점이긴 하더라도 내가 느낀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또 써요.

아이들이 산 하루하루의 숨들이 생생했다고, 그 하루가 모여 지금이 되었고, 미래의 어느 순간 제가 이 세상을 떠날 순간에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나는 행복했다. 너희들로 인해. 내가 나도 모르게 준 상처와 아픔을 용서해다오. 나의 삶은 이 소소한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커다란 기적이었다. 반짝이는 보석들을 키우며 내 삶에 잠시나마 품을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이 순간을 사는 단 하나뿐인 사람으로 시간이 지나 흐릿해져 빠져나가는 기억들이 아쉬워서 쓰며 잡아요. 과거에 메이고 싶진 않지만, 언젠가 들추어보고 소스라치게 그리울 지금을 조금 더 생생히 기억하고 싶어서 부지런히 써요.

그리고, 이제는 괜찮아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기록을 소유하는 가장 나다운 방법으로 이 순간을 아이들에게 선물해 줄 거예요. 온전한 순간을 수집하여 아름답게 담아 줄 거예요. 엄마가 사라져 없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꺼지지 않고 가슴 가득 살아갈 힘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요. 그렇게 부지런히 쓰며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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