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글쓰기
글을 쓰면 살 것 같았다. 모두가 다 작가가 될 수 있는 공간인 브런치에서나 작가라 겨우 불릴 뿐, 작가도 아닌 여자가 감히 글을 쓰면 살 것 같다고 외칠 수가 없어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다녔다.
현실세계에서는 이름조차 없는 그저 전업주부 엄마인 나는 내가 살겠다고 나를 발전시키는 것들을 어떻게든 사수해본다고 아이들을 대놓고 방치하는 엄마였다. 책을 읽고 싶어 아이들에게 일부러 영상을 보여주고, 글을 쓰고 싶어 아이들에게 일부러 블록을 꺼내 죄다 꺼내놓곤 한다.
돈을 벌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적인 가치를 주지도 않는 내가 이렇게 글을 쓴다고 앉아있는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꾸역꾸역 내가 원하는 시간을 어떻게든 누리고 나면 늘 묘한 죄의식으로 남는다. 마음이 홀가분해야 하는데 찝찝할 때가 점점 많아진다.
그것이 미안하여 괜히 한번 아이들에게 가서 '엄마가 갑자기 뭐 생각난 게 있었는데 그걸 바로 남기고 싶어서 그랬어. 기다려줘 거 정말 고마워.'라고 인사를 하고, 신랑에게 가서 '얼른 가서 이거 이거 할게. 시간 내줘서 고마워.'라고 감사를 표한다. 마음속으로는 '아, 이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우격다짐으로 그 시간을 끝낸다. 여운이 내 안에 남아있어 이후 육아를 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면 멍. 모드가 되어 아이들이 '엄마'를 여러 번 불러야 다시 현실의 나로 돌아오곤 한다.
"엄마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어?"
딸아이가 물었다.
나는 어린 시절, 행복한 어른이 되고 싶었었다. 나는 작은 꿈들을 꾸고 그것들을 하나씩 이루며 인정받는 어른이 되고 싶기도 했었다.
"엄마는 그런 어른이 되었어?"
딸아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행복한 어른이 되어있는가? 나는 꿈을 이루었는가? 나는 여전히 꿈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꿈을 꿀 수 있어서 숨을 쉴 수 있고 그렇기에 행복한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엄마는 꿈이 뭐였어?"
딸아이가 또 다시 묻는다.
나는 영어 커리큘럼 디자인을 하는 일을 즐겁게 하였었다. 그것이 과연 내 꿈이었을까? 그랬던 것도 같다. 영어를 사용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배치하며,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들. 내가 가진 능력을 조금이라도 나누며 살고 싶었던 시절의 꿈이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여전히 이는 나의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글쓰기 수업 한번 듣기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집안에 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바쁜 전업주부이다.
"그럼 엄마는 선생님이야? 작가야?"
딸아이가 묻는다.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선생님이었어.' 과거형이다.
'엄마는 작가가 되고 싶어.' 미래형이다.
"엄마는 근데 왜 지금은 안 가르쳐? 엄마는 왜 작가인데 책이 없어?"
아이는 순진한 눈으로 묻는다. 하마터면, '너희들 키우느라!'라는 비루하고 몹쓸 대답을 할 뻔했다. 하마터면, '성대결절이 심해서 목을 쓸 수 없어서!'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대며 구차해질 뻔했다. 그 딴 이유들이 정말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온다. 나는 왜 지금 이러고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이 울린다. 나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워낙에 예민하고 섬세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어린 시절 아이와 함께 하는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기억했을 때 행복한 어린 시절'을 선물해 주고 싶었던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던 그때의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긴 한걸까?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자의 쓸쓸한 분투다. 일상에 마음이 지친 내가 나를 살고 싶은 마음이 죄의식으로 돌아오는 도돌이표 안에 갇혀 오늘도 글을 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여야 할까? 내가 이루고 싶은 모든 것들을 꿈만 꾼다고 해서 괜찮은 걸까? 이루지 못한 꿈들이 모여 행여나 나의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패배감을 심어주지는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