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팅 단상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아 어느덧 얼얼해집니다. 시원한지 차가운지의 경계가 모호해지게 감각이 살짝 알딸딸하게 마비될 무렵, 등줄기에서 땀이 흐릅니다.
몬트리올 올드포트, 커다란 관람차가 아름답게 돌아가고 신나는 팝송에서 분위기 있는 샹송으로 노래가 넘어갈 무렵, 이제야 몸이 좀 풀렸나 봅니다. 한껏 긴장되었던 온몸이 가벼워지며, (과장을 조금 보태) 깃털처럼 얼음판을 샤르륵 미끄러져 나갑니다.
이 순간이 너무나 고파 그렇게도 아장아장 펭귄 같은 얼음판 시절이 있었나 봅니다. 한국에서 캐나다행을 결심하며, 미리 준비한 단 한 가지는 바로, 스케이트 초급 레슨이었어요. 스케이트화 혼자 들고 끈을 혼자 묶을 수 있게, 그리고 아장아장이라도 얼음판에서 혼자 다닐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아이들도 그리고 저희 부부도요. 그렇게, 살면서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영역을 처음 배워 살면서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한 나라에 왔습니다.
정착을 하며, 텅 빈 집에 필요한 장들을 보았어요. 월마트, 아이케아, 그리고 한국마트 순서로 장을 본 후, 네 번째로 간 곳은 캐네디언 타이어였습니다. 그곳에서 마침 세일하는 스케이트화를 사고 매일 스케이트장을 다녔습니다.
아이들은 야외 스케이트장을 선호해요. 뭔가 더 날것의 느낌이 나는, 바람을 가르고 태양의 조도가 바뀌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빛과 그림자가 얼음에 닿아 반사되며 만들어내는 풍경을 직접 보며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하네요. 실내 빙상장은 빙질이 정말 좋지만, 그런 재미가 덜하다고 해요.
둘째는 크로스-오버 스킬을 터득했어요. 따로 레슨을 하지 않고 있지만, 워낙에 이곳에는 스케이트를 잘 타는 분들이 많아 눈썰미 있게 보다 보면 눈앞에서 멋진 스킬들을 만나게 돼요.
그중, 자신이 배우고 싶은 스킬을 유심히 살핀 후, 따라 해보며 결국 커득해가는 과정을 뒤에서 묵묵히 바라봅니다. 레슨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보다는, 아이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잘하는 타인을 향해 찾아내고, 스스로 관찰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며, 셀프-러닝 하는 과정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선수시킬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배워도 괜찮은 것 같아요. 아이 스스로 빙판장 어디께에서 롤모델을 찾아내고, 그 안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점등을 직접 찾아내는 과정 모두가 살면서 배울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순서가 조금 달리 가도 괜찮아요. 학습이 선행된 후 실습이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주변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엘리져빌리티를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아이들은 매일 같이 학교를 꿈꾸고 , 설렘의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향수와 그리움이 함께 찾아왔습니다.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임을 알면서도, 아이들의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네요. 얼른, 좋은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는데... 책장 한편에 단정히 준비해 둔 학교 준비물만 매일 만지작 거리며, 혹시 전화 오는지 잘 살펴보라는 아이들, 그 간절한 마음에 가끔씩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스케이트장을 돕니다. 반바퀴 앞, 저만치서 둘째가 손을 흔들어 주면 환히 화답하면서요. 체력이 약한 첫째는 먼저 벤치에 앉아 열심히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유일한 동양 아저씨가 된 신랑은 자신만의 속도로 열심히 움직입니다. 뒤통수에서 진심이 느껴집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아름답게 들어온 불빛들이 얼음판을 만나 긴 빛그림자를 만들어냈어요.
이날 저는 아마 백 바퀴 이상 링크를 돌았던 것 같아요. 체육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자신 없고 못하는 과목으로 사랑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달리기, 오래 매달리기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학창 시절이 생각났어요. 특별한 기술은 없고, 스피드도 느리지만, 끈기와 오기로 무언가를 '참아내는 것'은 자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제가 기억 위 수면으로 떠오릅니다.
링크를 백번 이상 돌며, 결국 우리는 이기약 없는 초조한 기다림의 시기를 잘 참아낼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부디, 아이들이 너무 외롭지 않기를... 제 마음속 사랑이 더 넓고 깊어져서, 아이들이 또래 사이에서 채워갈 부분이 당분간은 엄마아빠의 사랑으로 대신 채워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정빙을 막 끝내 깨끗하던 얼음판이 사람들의 스케이트 날로 울퉁불퉁 자국이 남습니다. 뱅글뱅글 잘 돌다가 특정 부분을 미끄러질 때는 울퉁함에 균형이 깨지기도 해요. 어느 길이든, 아무리 조심스레 미끄러지더라도 자국이 남네요. 부디, 제가 가는 길에서 남기는 자국이 누군가를 넘어뜨리지 않기를 바라며 스케이트를 탑니다.
그리고, 역시나 "엄마, 혹시 학교 연락 왔어?" 하는 아이들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학교에서 오라고 하면, 우리 이렇게 여유 있게 못 놀잖아. 곧 연락이 올 거야. 그러니, 오늘하루를 즐겁게 잘 보내보자."
기다림이 길어지며 초조함이 자꾸만 마음을 잠식할 때, 스케이트화 들고 자꾸 나가야겠습니다. 추운 겨울을 제대로 누리면서요.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새로운 해가 떴습니다. 매일 같이 해가 뜨고 지는 갸륵한 기적을 목도하지 않을 거예요. 돌보지 않아도 묵묵히 펼쳐지는 갸륵한 기적의 무게를 느끼며 감사한 마음으로 느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