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부모님께 자랑거리가 되고 싶다.
350명 중 300등.
1995년 12월 어느 눈 오는 날.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봤다.
지금은 어떻게 고등학교를 들어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랬다.
시험을 치고 나오니,
아빠가 후문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고생했어, 잘 봤어?”
대답을 못했다.
정말 알 수가 없었으니까. 붙을지 떨어질지.
그걸 알면 내가 공부를 했겠나.
집에 도착하니 엄마는 옷을 차려입고 나가자고 했다. 고생했으니까 외식하자고.
늘 가던 복집을 갔다.
내가 복불고기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아빠가 전날 술을 많이 드셨으니 외식메뉴로는 딱이었다.
엄마, 아빠는 더 이상 시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험은 이미 쳤고, 이제 와서 후회한들 바꿀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는다고 늘 그러셨다.
다음날.
아빠는 여기서 태어나고 학교도 다닌 토박이였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은 훤하게 알고 있다.
그중에 내가 시험본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시험 결과를 전화로 물어보셨다.
“우리 아들 몇 등이냐?”
그냥 합격, 불합격을 물어보시지,
왜 등수를 물어보셨을까? 가만 보면 당연히 붙을 줄 아셨나 보다. 창피했다.
“300등, 그래도 잘했다. 우리 애도 겨우 붙었다, 10등.”
내 자식은 10등으로 붙은 게 아쉽고, 니 새끼는 300등으로라도 붙었으니 다행 아니냐라는 뜻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동네에서 잔치할 때 옆에 앉은 아빠의 친한 친구가 이야기해 주셨다.
근데 저 멀리서 우리 아빠는 그 옛날 당신의 속을 후벼 판 친구한테 술 따라주고 계셨다.
우리 아빠도 알고 보면 참 대단한 것 같다.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다.
잔치가 끝나고 아빠가 둘이서 한 잔 더 하자고 막걸리를 가지고 오셨다.
“나는 너 대학 가려고 삼수할 때도 믿었다. 넌 하면 할 놈이니까.
그래도 고맙다. 아빠가 처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자식 자랑해 봤다.”
나는 앞으로도 가끔은, 우리 아빠의 자랑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