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한 숟갈에 담긴 동양의 지혜, 율무 이야기
한여름의 밥상은 언제나 가볍고 시원해야 한다. 하지만 더위가 길어질수록 몸속 기운은 금세 빠져나가 버린다. 그럴 때 선조들은 늘 밥상 위에서 답을 찾곤 했다.
찰기 있는 쌀밥 사이로 반짝이는 하얀 알갱이, 씹을수록 고소하고 은근한 단맛이 도는 그 곡물, 바로 율무다. 한때는 ‘잡곡’이라 불리며 쌀밥의 조연쯤으로 여겨졌지만, 알고 보면 율무는 여름철 보약이자 오랜 세월을 견뎌온 지혜의 결정체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율무를 ‘의이인(薏苡仁)’이라 기록하며, “습기를 없애고 몸을 가볍게 한다”고 적었다. 여름철 몸이 쉽게 붓고 나른할 때, 어른들이 율무밥이나 율무죽을 찾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끈적한 더위와 함께 찾아오는 몸의 무거움을, 율무는 조용히 덜어주었다. 구수한 향이 밥상 위에 번지면, 그 자체로 한여름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요즘의 영양학도 이 곡물의 힘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율무에는 단백질이 풍부해 여름철 기력이 떨어질 때 근육의 손실을 막아주고, 비타민 B군과 무기질은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류신과 이소류신 같은 필수 아미노산이 고루 들어 있어, 현대의 피로한 몸에도 참 잘 어울리는 곡물이다. 또 율무에 함유된 코익세놀라이드는 염증을 완화하고 세포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전통의 지혜가 과학으로 증명된 셈이다.
율무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껍질을 벗긴 ‘정율무’는 밥에 넣기 좋고, 통째로 남은 ‘통율무’는 죽이나 차로 제격이다. 밥으로 즐기려면 쌀과 율무를 7:3 비율로 섞어 30분 정도 불려 함께 안치면 된다.
밥알 사이사이에서 톡톡 터지는 율무의 식감이 씹을수록 구수하고 고소하다. 조금 더 부드럽게 먹고 싶다면 율무죽을 추천하고 싶다.
푹 삶은 통율무를 곱게 갈아 물을 붓고 뭉근히 끓이면, 은은한 향과 함께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꿀을 한 스푼 넣으면 아이들도 잘 먹는 여름 보양식이 된다.
더위를 식히고 싶을 땐 율무차만 한 게 없다. 기름 없이 마른 팬에 통율무를 노릇하게 볶아 두었다가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한 모금마다 구수한 향이 입안을 감싼다. 냉장고에 넣어 하룻밤 우리면 시원한 냉율무차로 변신해 갈증을 부드럽게 풀어준다.
다만 율무는 약간의 차가운 성질을 지녀, 몸이 냉한 사람이나 임산부는 과도한 섭취를 피하는 것이 좋다. 보관할 때는 습기를 멀리해야 한다.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 혹은 냉동 보관하면, 오랜 시간 변함없이 신선한 맛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한 숟가락의 율무밥을 뜨면, 단순한 잡곡이 아닌 삶의 지혜가 함께 담긴다. 몸을 보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곡물, 여름철 보약이라 불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여름, 무더위로 기운이 빠진 날이라면 밥솥에 율무 한 줌을 더해보자. 구수한 향과 함께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선조들의 지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