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어느 식재료의 두 얼굴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국물 한 사발이 간절해지곤 합니다. 그 깊고 구수한 국물 맛의 중심에는 언제나 은빛 보석 같은 멸치가 자리하고 있지요.
한국인 1명당 일 년에 무려 4kg이 넘게 먹을 정도로 우리에겐 공기처럼 익숙한 존재이지만, 흥미롭게도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가장 싫어하는 음식 1위'로 꼽히기도 한답니다.
누군가에게는 향수어린 고향의 맛이,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넘기기 힘든 비린 맛으로 기억되는 건 아마도 우리가 멸치를 마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해온 멸치 육수는 사실 참 섬세한 조리법입니다. 멸치를 통째로 씹기보다는 뜨거운 물에 그 영양과 맛을 충분히 우려내어 비린 향은 날리고,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빚어내는 깊은 '우마미(감칠맛)'만 남기니까요.
반면 멸치를 주로 피자 토핑이나 앤초비 샐러드처럼 강한 소금기에 절여진 형태 그대로 마주하는 문화권에서는 그 강렬한 짠맛과 생소한 풍미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머리와 내장을 정성껏 떼어내고 맑게 우려낸 국물을 사랑하는 우리네 정서와는 조금 다른 만남이었던 셈이지요.
멸치가 우리 식탁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차지하는 건 비단 그 맛 때문만은 아닙니다. 보관이 쉬워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든든함은 물론, 뼈째 먹는 생선의 대표주자답게 우리 몸을 지탱하는 칼슘을 아낌없이 내어주니까요.
고기 한 점 없이도 진한 국물 맛을 내주는 이 천연 조미료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건강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우리에게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서양에서도 시저 샐러드의 깊은 풍미를 위해 남몰래 앤초비를 소스에 녹여 넣듯, 멸치는 국경을 넘어 요리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숨은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멸치를 요리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기다림'과 '수분'입니다. 큰 멸치는 깊은 국물용으로, 작은 멸치는 바삭한 볶음용으로 제 몫이 정해져 있지요.
혹시 멸치에서 나는 특유의 비린내가 걱정된다면 조리 전 마른 팬에 가볍게 예비 가열을 해보세요. 기름 없이 달궈진 팬 위에서 수분을 충분히 날려주면 비린내는 어느덧 사라지고 고소한 풍미만이 살아납니다.
간장 양념을 입혀 윤기 나게 볶아내거나, 고추장 양념으로 매콤하게 조려낼 때도 이 '수분 날리기' 과정만 기억한다면 마지막 한 점까지 바삭하고 맛있는 반찬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는 거부하고 싶은 맛일지라도, 우리에게 멸치는 엄마의 손맛이 담긴 육수이자 든든한 밑반찬인 따뜻한 존재입니다.
작지만 강한 이 생선 한 마리가 전해주는 고소한 영양은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가장 소박하고도 확실한 방법이지요.
오늘 저녁,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멸치 한 봉지를 꺼내 마른 팬에 달달 볶아 고소한 내음을 온 집안에 채워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 식탁의 평화를 지켜주는 이 소중한 식재료로, 오늘 한 번 해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