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남긴 고소한 선물, 우리 식탁의 주인공 멸치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어느 식재료의 두 얼굴

by 데일리한상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국물 한 사발이 간절해지곤 합니다. 그 깊고 구수한 국물 맛의 중심에는 언제나 은빛 보석 같은 멸치가 자리하고 있지요.


한국인 1명당 일 년에 무려 4kg이 넘게 먹을 정도로 우리에겐 공기처럼 익숙한 존재이지만, 흥미롭게도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가장 싫어하는 음식 1위'로 꼽히기도 한답니다.


누군가에게는 향수어린 고향의 맛이,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넘기기 힘든 비린 맛으로 기억되는 건 아마도 우리가 멸치를 마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기다림의 미학이 빚어낸 은은한 감칠맛의 깊이

image.png 멸치 육수 / 게티이미지뱅크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해온 멸치 육수는 사실 참 섬세한 조리법입니다. 멸치를 통째로 씹기보다는 뜨거운 물에 그 영양과 맛을 충분히 우려내어 비린 향은 날리고,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빚어내는 깊은 '우마미(감칠맛)'만 남기니까요.


반면 멸치를 주로 피자 토핑이나 앤초비 샐러드처럼 강한 소금기에 절여진 형태 그대로 마주하는 문화권에서는 그 강렬한 짠맛과 생소한 풍미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머리와 내장을 정성껏 떼어내고 맑게 우려낸 국물을 사랑하는 우리네 정서와는 조금 다른 만남이었던 셈이지요.


뼈째 먹는 단단함 속에 숨겨진 천연의 영양

image.png 멸치 / 게티이미지뱅크

멸치가 우리 식탁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차지하는 건 비단 그 맛 때문만은 아닙니다. 보관이 쉬워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든든함은 물론, 뼈째 먹는 생선의 대표주자답게 우리 몸을 지탱하는 칼슘을 아낌없이 내어주니까요.


고기 한 점 없이도 진한 국물 맛을 내주는 이 천연 조미료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건강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우리에게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서양에서도 시저 샐러드의 깊은 풍미를 위해 남몰래 앤초비를 소스에 녹여 넣듯, 멸치는 국경을 넘어 요리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숨은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비린내를 잡고 바삭함을 깨우는 따뜻한 불의 손길

image.png 멸치볶음 / 게티이미지뱅크

멸치를 요리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기다림'과 '수분'입니다. 큰 멸치는 깊은 국물용으로, 작은 멸치는 바삭한 볶음용으로 제 몫이 정해져 있지요.


혹시 멸치에서 나는 특유의 비린내가 걱정된다면 조리 전 마른 팬에 가볍게 예비 가열을 해보세요. 기름 없이 달궈진 팬 위에서 수분을 충분히 날려주면 비린내는 어느덧 사라지고 고소한 풍미만이 살아납니다.


간장 양념을 입혀 윤기 나게 볶아내거나, 고추장 양념으로 매콤하게 조려낼 때도 이 '수분 날리기' 과정만 기억한다면 마지막 한 점까지 바삭하고 맛있는 반찬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다시 발견하는 우리 식탁의 은빛 보물

image.png 멸치 / 게티이미지뱅크

비록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는 거부하고 싶은 맛일지라도, 우리에게 멸치는 엄마의 손맛이 담긴 육수이자 든든한 밑반찬인 따뜻한 존재입니다.


작지만 강한 이 생선 한 마리가 전해주는 고소한 영양은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가장 소박하고도 확실한 방법이지요.


오늘 저녁,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멸치 한 봉지를 꺼내 마른 팬에 달달 볶아 고소한 내음을 온 집안에 채워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 식탁의 평화를 지켜주는 이 소중한 식재료로, 오늘 한 번 해보자고요.



작가의 이전글밤을 잊은 그대에게 건네는 황금빛 열매의 자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