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나고, 손으로 먹고
근데 고구마는 두더지가 먹고
나는 서울을 가득 채운 평범한 회사원 중 한 명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평범한 사람이란 건 없다. 모두가 다 평범하지 않은 개인만의 역사와 감성과 고난과 행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평범한 회사원들은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붐비는 도심으로 향한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나는 제일 먼저 빈 속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전날 매출을 본다. 이런저런 시트에서 숫자들을 본다. 그저께보다 어제 얼마나 더 팔았는지를 본다. 어제 매출이 백만 원이건 천만 원이건, 직전날 보다 몇 퍼센트 성장을 했든 간에, 내 눈에는 그저 손에 잡히지 않은 숫자들의 나열일 뿐이다.
매일 앉아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들기며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을 팔면서 싸우고 애쓰다 보면, 월급을 받는다. 매 월 그렇듯이, 똑같은 숫자가 내 통장에 찍혔다. 이 돈도 역시 어떤 노고에 대한 보상인지도 잘 모르겠는 숫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 돈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6천 원짜리 커피를 매일 사 마신다.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공간을 다녀왔다. 3호선도 타고, 경의중앙선도 타고, 경춘선도 타고, 오빠 손 잡고 따라가다 보면 아담하고 예쁜 집이 나온다. 그 아담한 집의 마당은 끝이 없다. 아무리 여러 번 알려주셔도 도무지 이름이 외워지지 않는 꽃과 풀들, 요즘 시대 귀한 사과와 포도가 자라는 나무들, 그리고 큰 창 밖으로 한가득 보이는 산의 능선과 하늘과 구름이 모두 이 집의 마당이다. 꽃과 풀은 손에 쥐면 향이 나고, 사과와 포도는 입에 넣으면 달달한 과즙이 나온다. 흙은 밟으면 푹신하고, 구름이 지나갈 때는 선선한 그림자가 진다.
고구마는 두더지가 먹어 버리기 전에 다 캐야 했지만, 벽을 타고 올라온 넝쿨에 있는 마 열매는 수확을 해야 했다. 난생처음 보는 못난 마를 보니 웃음이 나왔고, 주렁주렁 한꺼번에 매달려있는 줄기를 발견하면 신나는 마음으로 한 알 한 알 톡 톡 땄다. 예상외로 풍년이라 바구니를 하나 더 가져와서 담았다. 까맣고 곰보가 나 있는 마 열매는 둥근 감자 같은 모양도, 울퉁불퉁한 공룡 모양도 있었다.
집에는 땅콩이 수북이 있었다. 땅콩은 껍질을 까고 볶으면 우리가 먹는 땅콩이 되는데, 땅콩 껍질 까기에는 악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오빠와 나는 중간에 땅콩 바구니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땅콩 껍질을 깠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두 알이 한꺼번에 떨어질 때도 있지만, 힘을 너무 많이 줘서 땅콩이 부서질 수도 있다. 그래서 악력 컨트롤과 같은, 확실히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집을 떠나기 전에 내 배낭에는 온갖 먹을 것들이 가득 찼다. 공룡 모양의 마 열매, 고구마, 김치 해 먹으면 맛있는 고구마 줄기, 애호박, 가지, 모두 이 마당에서 나온 것들이다. 배낭을 멘 내 어깨가 꽤나 뻐근했다.
내가 사는 세상은 많은 것들이 숫자로 대체되었다. 많은 노동들이 내 손을 떠나 멀리멀리 전선이나 위성을 타고 가상의 공간에서 해결된다. 눈으로는 보이지만, 손으로는 만질 수 없다.
근데 흙을 밟고 풀을 헤쳐서 손으로 마 열매를 따면, 없던 마가 생긴다. 단단한 땅콩 껍질을 손에 힘을 줘서 깨 부시면, 안에 두 알의 땅콩이 떨어진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사과나무를 심어서 정성을 쏟아주면 맛있는 사과를 얻는다. 쉬지 않고 손을 꼼지락거리면, 손에서 귀한 것들이 자라난다. 그것들은 내가 만질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맛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많이 길러낸 것들이 내 어깨를 뻐근하게 하는 만큼, 내 노동도 더 값지게 느껴질 것이다.
만약 내가 직접 커피콩을 수확해서 볶아서 갈아서 내려 마신다면, 지금처럼 잠을 깨기 위해 꾸역꾸역 빈 속에 한 입에 후루룩 마셔 버릴 수 있을까?
많은 것들이 손에 닿지 않고 숫자로 대체되면서, 감사함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사라진 거 같다. 적어도 숫자고 데이터고 뭐고 그런 거 잘 모르는, 수포자인 나에게는 그렇다.
그러니까, 손을 바삐 움직여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만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