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에 또 늦으셨네요

매일 약속 시간에 늦는 건에 대하여

by 현주

"15분이나 늦었어요. 이런식으로는 저도 치료 못합니다."

나의 첫 정신과 의사선생님은 약속 시간에 굉장히 예민한 분이셨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염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취업준비생인 나를 배려해서 저렴하게 1시간 상담을 해주셨는데, 그것도 보통 출근시간보다 1시간 이른 시간을 따로 떼어 나와의 상담을 이어가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 귀한 상담시간을 매번 2분, 5분씩 지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담당 의사선생님께 죄송한 마음 뿐이다.


당시 내게 5~10분 늦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늦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도 다음 상담 일자를 아예 잊기도 했다. 자신의 시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치료도 이어갈 수 없다고 하시는 의사선생님의 경고를 듣고 나오는 길, 도대체 나는 왜 이모양 이꼴인걸까?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SNS에 새로 업데이트된 포스팅은 없는지 둘러보느라 엄지손가락은 바빴다.


약속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정말이다. 그저 약속 시간까지 시간 계산이 잘 안될 뿐이다. 약속 시간에 늦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일찍 도착할 때도 있었다. 한 1시간 전 즈음. 어떻게 시간을 예측해야 15분 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샤워를 하다가 딴생각을 하느라 평소보다 10분이나 더 지체됐고, 머리를 말리다가 최근에 빌려온 책이 흥미롭게 보여서 몇 장 읽었더니 20분이 지나있었다. 집 밖을 나가려다가 화분에 꽃이 핀 것을 보고 사진을 찍느라 5분이 지났다.


이정도면 지능의 문제가 아닐까? 싶지만....그래도 단기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벼락치기를 하면서 살아도 평균 이상은 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이걸로 내 지능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묻는다면, 이제는 대부분의 약속시간에 늦지 않는다.

복용하는 ADHD약이 생각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걸 어느정도 잡아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방법도 의식적으로 연습한 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가고싶지 않은 약속에는 여전히 늦는다.

이 부분은 여전히 행동을 교정 하고 있는데,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면 죽어도 하기가 싫다.


약물치료로도 고칠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많았다.

넘어야 하는 허들이 눈 앞에 끝도없이 높여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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