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게 999가지

ADHD 판정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

by 현주

처음에는 우울증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우울증 약을 복용한 지 3개월이 지날 때 즈음 내 상태는 이전과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좋아졌다. 상담 시간에 지난 2주 동안 무엇을 했는지 의사 선생님께 쫑알쫑알 늘어놓았다. 북토크에 갔고, 요가도 배우기 시작했다. 문득 마라톤이 나가고 싶어 져서 3달 뒤에 열리는 JTBC마라톤 10KM를 신청했고, 그래도 취준생인데 공부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토익 인터넷 강의도 끊었다.

제법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자랑스럽게 미주알고주알 보고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그렇군요. 무리하지 말고. 다음 진료시간에 봅시다. 혹시라도 우울감이 심해지면 언제라도 연락해요."

칭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잘하고 있다는 응원정도는 기대했던 터라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의욕이 넘쳤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2주 뒤, 의사 선생님은 지난 상담에서 말했던 활동들을 잘 이어나가고 있는지 물으셨다. 러닝크루도 재밌게 나가고 있고, 토익 공부는 매일은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의사 선생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갑자기 의욕이 넘쳤다가 우울증이 심해지는 경우가 있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원래 활동적인 분이셨군요." 그제야 왜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안 좋았는지 이해가 됐다.

"요즘 우울하지는 않아요. 가끔 과호흡이 오긴 하는데, 요가를 시작해서 그런지 많이 괜찮아졌어요."

"다행이에요. 그럼... 이제 그동안 했던 수많은 활동들의 범위를 좁혀서 가장 해야 하는 것에 선택과 집중을 해보는 건 어때요?"

"가장 해야 하는 거요? 이거 다 중요한데요? 전 다 하고 싶은데..."

정말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게 다 중요해 보였다. 이 중 어떤 걸 선택하고 집중해야 한다는 걸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ADHD 검사를 해보면 어떨까요?"

뜻밖이었다. ADHD라 하면 정신 사납고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어린이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내가 그 정도였단 말인가? 당시 성인 ADHD가 이제 막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할 때라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처음엔 조울증을 의심했어요. 우울증이 많이 호전된 상태에서 보니, 성인 ADHD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저는 어릴 때 차분한 아이 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ADHD일 수가 있나요?"

"학계에서 여전히 찬반논란이 있는 주제예요. 쉽게 단정 지어 말하긴 어렵지만, 특히 여성의 경우, 조용해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일을 벌여놓고, 마무리나 정리 정돈을 어려워하는.. 그런 케이스들이 보고가 많이 되고 있어요."

이 외에도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한다거나, 뭐 하나에 꽂히면 하던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것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증상, 절차를 따라야 하는 일을 힘들어한다는 것이 성인 ADHD의 주요 특징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 나라는 사람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 같은 ADHD 증상에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그 이후 의사 선생님께서는 ADHD 검사를 여러 차례에 걸쳐 신중하고 꼼꼼하게 진행해 주셨다.


그리고 매미가 우렁차게 울던 어느 더운 여름, 나는 공식적으로 ADHD 판정을 받았다.




이전 02화약속에 또 늦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