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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좀 그만 하면 큰일나나요

일을 만들어서 하고 그래요 왜

by 윤슬

저항 좀 해. 체제에 순응하려고 태어났어?


"1월에는 야근을 좀 하자. 9시 정도까지 하면 좋을 것 같아."

시무식 회의에서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청천벽력이었다. 아니, 9시까지 일을 하라고?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것만으로도 내 하루가 없다는 생각에 그토록 죽고 싶었는데 도대체 9시까지 회사에 남아 앉아서 일을 하면 내 정신이 남아나긴 할까. 두려웠다.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하루에 8시간 일 하는 것도 솔직히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생각하는데, 야근까지 강행하면서 일을 늘려야 할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노동법상으로 근무시간을 제한하고, 하루 8시간이니 주 40시간이니 법적으로 제한해도 여전히 야근이 당연한 노동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다. 나는 신입이니까, 라는 핑계라도 대면서 칼같이 퇴근하고 있지만. 당장 우리 부서에서도 파트장을 담당하고 있는 사수가 정시에 퇴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밥을 먹고 종일 앉아서 일하느라 소화가 더뎠고, 장기도 불편했다. 소설 쓰는 일이 좋아서 개인적으로 습작도 쓰고, 출판 계약을 목표로 두고 있는 단편 원고 작업도 해야했는데,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느라 혹사당한 눈이 집에만 돌아오면 파업을 선언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만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계속 앉아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신이 지치니 뭘 할 기력이 들지 않았다. 퇴근 후 격한 운동을 하러 가려면 꽤 강한 의지가 필요했다.


퇴근 후에 내가 원하는 일들을 따로 하려면, 하루를 삼등분으로 나눠서 세 배의 몫으로 살아야 했다. 아침 5시 40분에 일어나 새벽 운동을 하고, 씻고, 출근 준비하고, 도시락을 싼다. 8시부터 9시까지는 지하철 속 콩나물시루 같은 사람들 틈에 껴서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게임을 한다. 한 시간여의 러시아워를 견디고 나면, 그 때부터 노예처럼 종속된 시간이 시작된다. 하루 8시간, 아니 점심시간도 완전한 자유라고 보긴 어려우므로 거진 9시간을 직장이 원하는 일만 하며 살아야 한다. 집에 돌아가는 길 1시간은 또다시 사람들 틈에 껴서 이송되는 시간이다.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오후 8시가 되어서야 하고 싶은 일을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와중에 하루 종일 근육을 쓰지 않고 앉아서 일했다는 죄책감에 마음 편히 누워있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해가 떠 있는 대낮엔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해야 했고, 하고 싶은 것은 억누르며 참아야만 했다. 하루의 1/3, 깨어 있는 시간의 1/2를 그렇게 보내야 한다.


정말로 금욕적인 삶이란 절이나 산에 들어가 소비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억지로 노동하는 현대인들이다. 소비는 억눌린 자유의 비뚤어진 표현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더 많은 노동의 보수가 아니라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시간이다. 아무리 야근 많이 해서 돈을 더 벌어 봤자, 그걸 쓸 시간도 없다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심지어 우리가 매일을 낭비하도록 만드는 이 일이, 과연 이 지구에서 꼭 필요한 일일까? 이렇게까지 우리의 인생을 갈아넣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적어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예컨대 하루에 왜 이렇게나 많은 웹소설을 유통해야 하는 것일까? 유통할 만큼 질이 좋은 작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음지에서나 다루어져야 할 유해 매체 수준인 글을, 양지에까지 끌어올리는 일에 도대체 무슨 의미나 보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개떡 같은 원고나 교정하려고 내가 태어나서 그 개고생을 했나 싶다. 이건 정말 그 누구도 위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노동이 그렇다. 단지 일을 위한 일, 돈을 위한 일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 하며 사람들을 소진시킨다. 게다가 회사는 더 많은 매출을 위해 휴식 대신 쓸데없이 일을 자꾸 늘려댄다. 일을 만드는 방법도 아주 가지가지였다. 그 창의성을 조금 더 건전하게 발휘해 주면 좋겠건만. 왜 사람을 착취하는 데에 그 머리를 굴려대는 건지 모를 일이다.


요즘 글을 쓰는 것에 완전히 재미 들린 나는, 각잡고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돈이 되는 글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에 투자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전에 대여섯 시간 정도만 육체 노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마음껏 누워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조건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구직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일자리는 대부분 돈을 굴리기 위해 억지로 만든, 일을 위한 일이었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의미 없이 노동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구직 사이트가 아니라 스팸 메일함 같았다. 올라오는 것들이 죄 스팸 공고로 보였다.


육체노동이어야 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앉아서 하는 정신 노동이 마치 동물원에 갇힌 코끼리가 된 것처럼 몹시도 갑갑했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써서 머리를 비우고 싶었고,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몸을 쓰지 못하고 종일 의자 앞에 강제로 묶여 있으니 그게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운동 부족이 걱정됐고, 척추가 아팠다. 적어도 근손실 걱정이나 비만이 될 걱정 없이 집에 가서라도 마음 편히 누워 쉴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마땅한 일은 없고, 올라와 있는 일 중에선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살아갈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이 회사 계약이 끝나면,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막막했다. 무기력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삶을 계속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똑같은 일만 죽어라 뺑이치며 살자고 정한 건가, 찾아가서 멱살을 잡고 싶은 분노가 일었다. 내 올해 새해 첫곡은 레미제라블이었다.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노래. 나는 현대 사회가 정해 놓은 노예의 숙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영원히.



세상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이전 세대에 대한 원망이 일었다. 누구야. 어떤 놈이 자본주의 시작하자 했어. 자아 실현은 개뿔, 자본주의 사회 아래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에 봉사하는 노예의 삶을 살면서 매 순간 자아를 살해한다. 이걸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도시 생활자와 월급쟁이들은 언데드다. 좀비처럼 숨은 붙어 있으나 영혼은 죽고 없다.


https://www.youtube.com/shorts/_E3OiDGHhdc

영상 말미의 "죽어야 끝나려나"라는 대사가 너무나도 와닿는다. 이 돈을 위한 맹목적인 노동이 나의 생존을 좌우하는 구조에선, 생존하려면 이 생활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도 무너지고 정신도 무너지고 남아 있는 거라곤 쥐꼬리만 한 통장 잔고뿐인 이 삶을 끝장내는 방법은 "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 만들기"다. 소비와 노동을 멈추는 것. 더 위대한 무언가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 경쟁하며 자산을 불리지 않는 것으로의 이행이다. 나 혼자 부자가 되어 경제적 자유 이룩하기는 허상의 자유다. 로또 당첨은 이 파괴적인 소비-생산 굴레의 세상에서 완전한 이탈을 보장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세상이다. 거기에선 그 누구도 괴로워하며 애 쓸 필요가 없다.


관련해서 좋은 책이 있다.

한병철 -관조하는 삶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614185

한병철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을 그도 추구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에서 그 사실이 확실해졌다. 책에서 한병철은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자연농을 언급하며 무위 자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브람 알퍼트 - <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3040971

또한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생태적 불안이 위대함에 대한 추구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나는 "위대함"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는 그의 지적이 현재 사회에 꼭 맞는다고 생각한다. 피라미드 게임에서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 우리는 나날이 경쟁하고, 과로하고, 스스로를 혐오하고, 자기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넣으며 자연을 돌보는 일에서 소홀해졌다. 더 대단한 업적을 세우지 않아도 괜찮다면 어떨까. 굳이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


건전하게, 세상을 위하는 생각을 하고 그 길을 추구하며 살고싶어도 무의미한 노동에 사로잡히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지나친 노동은 정신을 파괴한다. 그렇게 사회 전체적으로 교양을 잃고 마는 거다.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더 이상 돈을 위해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기계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일하는 좀비의 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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