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좋은 기회가 생겨서 우프코리아의 활동가로서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프가 화폐를 중심으로 한 거래가 아닌, 신뢰와 관계를 중심으로 한 비화폐 교환 운동인데다가, 그 운동의 배경지가 자연농,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이기까지 해서 다양한 대안적인 움직임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시도라고 생각해서 정말 좋아하는데 감사하게도 우프코리아의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2달 전 쯤 총회에도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저는 그 때 저를 생태 아나키스트라고 소개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멋있다고 박수를 쳐주셔서 멋쩍으면서도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아나키즘이 뭐냐고 물어오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이런 의미냐며 인터넷에 아나키즘을 검색해서 보여주시더라고요. 거기에는 단순하게 무정부주의로만 해설되어 있었고 상당히 반사회적인 이미지로 서술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국에선 아나키즘, 아나키스트라고 하면 무정부주의로만 번역되는데 번역이 너무 아쉽습니다. 무정부주의라고 하면 왠지 쿠데타, 혼돈의 카오스... 이런 이미지들이 연상 되는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고 단순히 정부를 몰아내자는 느낌의 좁은 의미도 아닙니다.
Anarchism 에서 archi는 위계질서라는 뜻입니다. An은 없을 무 자입니다.
위계질서가 없는 것을 지향하는 게 궁극적으로 아나키즘의 목표예요.
저 같은 경우 여성으로 살면서 자본이 주는 억압,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억압, 가부장제가 주는 억압 등의 교차적 억압을 많이 느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우리를 억압하는 지금의 체제를 갈아 엎고, 뛰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체제 안에서 왕이 되어봤자 결국 체제를 떠받드는 무수리일 뿐입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업 이후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자산 축적의 욕심이 생긴 남성이, 자기 후손에게만 자산을 물려주기 위해 여성의 성생활을 단속한 것이 일처일부제- 결혼제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농업 문명과 함께 가부장제가 시작되었고, 가부장제는 자산 축적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문명-가부장제-자본주의 사이에 연관성이 없을 리가 만무하죠. 세 가지 모두 여성을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여성은 가부장제 이후 가정이라는 공간에 묶이게 되었고, 이전까지 가정의 일이 곧 삶이었던 인류의 생활 양식에 남성들이 만들어 낸 공적 영역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적 영역은 전쟁으로 인해 부족 단위가 마을로, 마을 단위가 도시로, 그것이 또 국가로 커지면서 점점 거대해졌습니다. 공적 영역의 중요성만이 극단적으로 부풀려지고 가시화된 게 지금의 신자유주의 사회입니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폄하되고, 비가시화되며, 공짜 노동 취급당하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하루를 자책하는 스스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꼭 무언가를 해야지만 인생이 되고, 삶이 되는 것이 아닌데 밥을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상을 우리는 무의미한 것이라 가치절하합니다.
그런데 그 일상과 가정이 가치절하되는 과정에서 인간성도 말살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생겨버려서 타자의 자유를 착취하며 살아가게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러한 착취-피착취 관계에 놓이는 일련의 모든 상황에 반대하고자 생태아나키스트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고, 생태 아나키즘의 정신으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위계로부터 벗어나 모두가 자유를 되찾도록 하자는 사회 운동이 바로 아나키즘 운동입니다.
사실 사회 운동이라 하면 되게 결연해야 할 것 같고 자기 희생적이고 수행적이어야 할 것 같다며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아나키즘 운동은 다음 세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1. 내 힘으로 살기
2.자유롭게 살기
3.즐겁게 살기
간단하죠?
내 힘으로 살아야 남을 부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고, 내 힘으로 살아야 남의 시혜를 기다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장님이 월급 주길 기다리는 삶은 내 힘으로 사는 삶이 아니겠죠^^)
그리고 내 힘으로 살아야 자유롭게 사는 게 가능합니다. 내 앞가림 내가 하면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이거 정말 중요해요. 즐거움의 선행 조건은 자유고, 자유의 선행 조건은 자립입니다. 삶은 원래 즐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고통의 집제 이딴 게 아니란 얘깁니다. 삶을 즐겁게 살아야 타자가 눈에 보입니다. 내 마음이 즐거워야 여유가 생기고 남을 돌볼 마음도 생깁니다. 내가 고통스러운데 다른 존재가 눈에 보일 리 없습니다. 덕을 베풀려면 내 마음이 여유로워야 하는데, 삶을 고통의 연속으로 여기면서 무슨 여유를 찾는단 말인가요?
아프리카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근대화로 인해 찻길이 개발되어있고, 차가 다니고, 도시와 가게가 있는 곳에서는 아이들이 사람만 봤다 하면 뛰어와서 구걸을 합니다.
하지만 찻길도 도시도, 가게도 없는 깡시골 촌구석에 사는 아이들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요. 그런 곳에서 자란 아이는 놀랍게도 사람을 보면 달려와서 먹던 과자를 나누어줍니다.
GDP는 전자가 더 높겠지만 삶의 질과 정신건강, 공동체의 안녕 등 행복 지수는 후자가 더 높습니다. 자립할 수 있고, 자유롭게 사는 아이들은 웃는 얼굴이었고, 그만큼 마음도 단단하며 즐겁게 살기 때문에 남에게 나누어 줄 여유도 생깁니다.
(여담이지만 제 생각에 스님들이 죽을때까지 목탁 두드리며 살아도 부처 못 되시는 이유는 삶을 고해(苦海)라고 가르치는 교리 때문이지 싶어요. 게다가 목탁 두드리고 즉문즉설 하시고 백팔배 하시는 스님들 밥 차려드시는 거 보면 다 남(찬모님)을 부려서 드십니다. 본인 식생활 자립도 안되시는 분들께서 무엇을 베푸실 수 있을까요? 종교가 생겨나게 된 것은 계급사회의 출현때문이고,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상당히 가부장적입니다. 종교에도 모순이 많습니다.)
제가 원하는 미래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럽거나 수행적이거나 자기 절제와 금욕으로 점철된 삶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미래는 누구나 웃고 떠들고 즐기고 어울리며 잘 먹고 잘 자고 잘 숨쉬는 것에만 집중하면 그만인 안분지족, 낙도의 삶입니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바라며 끙끙대는 삶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절제하고 참으며 고통 받는 삶도 아닙니다.
원하는 것이 아주 단순하여 이미 내 손 안에 있고, 모두와 나눌 정도로 충분하여 더 이상 원할 필요가 없는 삶입니다.
그냥 아프리카 초원의 코뿔소처럼 사는 거예요. 뒹굴고 싶을 때 뒹굴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연의 이치에 맞게 살면 그 뿐인 평온한 생이요. 할 수 없다, 유토피아다, 이상주의다 등등... 많은 말을 듣지만 인간도 동물이며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모두 마련해주었어요. 인간만 애쓰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나무늘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멸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나무늘보를 본 받아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