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인 음식에 보수적인 이탈리아
로마하면 세계적인 관광지이고 1년 내내 로마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도시이지만, 먹을 것에 있어서만큼은 참으로 보수적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국제적인 관광도시라는 명성에 참으로 걸맞지 않게 제대로 된 외국 음식점을 찾기가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 심지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발에 채인다는 중국 식당도 의외로 찾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찾아도 먹을만하게 하는 데는 매우 드물다.
동네 이곳 저곳을 다녀봐도 제대로 된 식당은 늘 언제나 파스타 집이나 피자 가게일 뿐이다. 간간히 싼 가격에 무한리필 가능하다는 중식/일식 대충 합쳐논 국적불명의 스시집이 있기는 하나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스시나 사시미를 기대할 수는 없을 뿐더러 그나마도 아주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야지나 고를만한 옵션이 생긴다. 시내를 살짝 벗어나 주변부의 주택지역에 사는 나는 정말 외식하러 나갈 수 있는 식단의 선택권이 거의 없다.
그만큼 피자와 파스타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충성도는 가히 맹목적이다. 슈퍼에서 파스타 코너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절대적이며 생파스타에서부터 건파스타까지 그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사실 내가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것이 이 다양한 파스타의 종류다. 수없이 많은 종류들이 실제로 맛에서 큰 차이가 나기보다는 파스타의 모양에 따라서 소스와 섞이는 방법이 다르고 씹는 촉감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이 되곤 한다는데... 무딘 입맛의 나로서는 물론 약간 다른건 인정하겠지만 어떤 파스타를 어떤 소스에 맞추느냐가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해 마지않는 이탈리아인들의 열정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탈리아는 지방마다, 도시마다 그 지방을 대표하는 파스타 종류가 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탈리아 파스타 지도를 보고 정말 저리도 구분할까 싶었는데, 정말 의외로 그 지방에 갔을 때 그쪽의 대표 파스타를 시키면 다른 곳에서 먹는 것과는 좀 신경 쓴 느낌이 들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로마의 가장 대표적인 파스타는 카치오 에 페페 Cacio e Pepe. 치즈라는 뜻의 cacio와 후추를 뜻하는 pepe. 말 그대로 파스타에 치즈를 버무리고 후추 양념한 파스타이다. 여기에 돼지고기가 들어가면 Gricia 그리치아 파스타가 되는거고, 그리치아에 계란이 더해지면 Carbonara 카르보나라, 그리고 그리치아에 계란 대신 토마토가 더해지면 amatriciana 아마트리치아나가 되는 신기한 파스타의 세계.
카치오 페페는 재료가 간단한만큼 대체적으로 어느 식당에나 다 있는 기본 파스타 중에 기본이지만, 정말로 맛있는 카치오 페페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건 마치 어느 집에나 다 된장찌개 백반 있지만 정말 깊은 맛의 된장찌개를 잘 끓이는 집은 찾기 힘들다는 우리나라 식당과도 같은 이치인가보다.
회사 주변이 비교적 로마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식당이 모여 있다는 곳이라 정통으로 로마식 카치오페페를 하는 집이 바로 코 앞에 하나 있다. 워낙 가깝다보니 가끔 손님이 오거나 회사 사람들이랑 밥을 먹을 때 자주 가는데 이 집의 카치오페페는 다른 집과 다르게 얇게 튀겨진 치즈 바구니에 담겨서 나오는 게 특징이다. 살짝 덜 익은 면을 반쯤 녹인 치즈에 버무리고 그 위에 또 치즈가루를 뿌린 다음, 후추 약간 뿌려 튀긴 치즈 바구니에 담겨나오는... 치즈에 참으로 충실한 음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손님이라고 아무나 데려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지난 1년간 다양한 사람들을 이 곳에 데려가본 결과, 문화권에 따라 상당히 평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어쨌든 익숙함에 대한 선호도인지라, 다양한 양념과 보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아시아 쪽 사람들은 미묘한 치즈의 짠맛과 후추의 배합에서 큰 감동을 느끼기 어려워 한다. 반면 치즈 문화에 한껏 길들여진 미국이나 유럽, 서구권 사람들은 여기 데려가서 이걸 시키면 황홀 전 단계 정도까지 이르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이 식당은 얼마전 세상을 떠난 셰프 안소니 부르댕이 로마에서 가장 좋아했던 식당 중 하나라 하는데, 그가 살아 생전에 여기 카치오페페를 일러 섹스보다 더 맛있다고 평한 적이 있을 정도이니 치즈 문화권의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당시 그는 이 평가로 인해 식당이 과도히 알려지는 게 싫다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유추해서 알아내는 바, 언제나 예약을 하고 가는게 바람직한 식당 중 하나이다.
점심에 저거 하나 먹고 나면 일주일은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느낌으로만 남지 않고 체중계에 같이 남아서 늘 시키면서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린다. 사실 원래 이탈리아식으로 하자면 파스타는 코스 중 첫번째 요리로서 그 후에 고기나 생선을 또 시켜 먹는게 정석이라는데 가끔 옆에서 근 3시간에 걸쳐 정말 그렇게 시켜먹는 이탈리아인들을 보면 저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가, 맥주나 소주를 짝으로 마시기도 하는 우리의 기이한 회식문화가 생각나면서 그래 불가능이란 없을거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로마에 살면서 새롭게 알아낸 점 하나는 대부분 앉아서 먹는 식당들이 피자는 저녁에만 한다는 점이다. 화덕에 불을 피우고 일정 온도에 이르게 한 다음 그걸 내내 유지해야 하는데 무조건 점심과 저녁 사이에 식당이 쉬는 이 곳에서는 점심 때 화덕 불을 피워서 저녁까지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메뉴판에 피자 메뉴가 있어도 관광지가 아닌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저녁에만 가능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길거리를 다니다보면 우리나라에서 김밥천국만큼이나 자주 보이는게 조각피자 집이다. Pizza al taglio 라고 해서 대부분은 앉을 곳도 없이 서서 먹거나 들고 나가 어디 광장에 앉아 먹는 피자이다. 다양한 종류의 피자를 큰 사각 오븐팬에 통째로 구워서 원하는 맛을 원하는 크기만큼 잘라서 주는, 그리고 가격은 무게만큼만 받는 즉석 음식 전문점이다. 이 조각피자 파는 전통 역시도 로마가 원조라고 하니 일국의 수도는 수도로구나 로마야.
주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원하는 피자를 고른 후 아저씨가 적당한 크기의 조각을 자르기 위해 칼을 대충 피자 위에 얹으면 아니 그거보다 조금 작게, 내지는 그거보다 크게! 라고 흥정해서 내가 원하는 크기의 조각이 될 타이밍에 ok 를 날리면 아저씨가 그대로 잘라준다. 딱 보기에 조각이 커보이면 먹기 좋은 크기로 좀 더 작게 잘라주고, 원하면 다시 한번 오븐그릴에 데워서 무게 잰 뒤 건네주는 제일 먹기 간단한 음식 중 하나다.
간편해서, 그리고 차가운 샌드위치보다는 따뜻한 음식의 느낌이 좋아서 한동안 점심 때 조각 피자를 자주 먹으러 갔다. 그리고 지금은 매우 후회하며 자주 가지 않는다. 먹는 것에 관대한 이 나라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자칫 무게의 끈을 놓아버리면 어쩌나 하고 매우 걱정되는 나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