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자의 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간다. 아침 공기는 방금 막 필터를 교환한 것처럼 쌩쌩하다.
오늘은 같은 버스를 타지만, 조금 더 멀리 나가 볼 생각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국회도서관.
나의 여정은 늘 한결 같았다. 나들이를 가도 집에서 광화문이나, 멀리 가봐야 북촌이나 서촌 정도였다. 다른 곳도 가보고 싶었지만 지하철이나 버스를 마음먹고 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포기하기 일쑤였다. 생활 터전 바깥으로 나서기 싫었던 것이다. 볼펜으로 그은 선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개미처럼, 나는 익숙한 길에 머물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여기저기 걷는 다리가 있어 감사했다고 했는데,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이 나왔다. 나는 알던 길만 알았고, 그것만으로 서울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서울의 심장부에 살고 있고,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동네만큼 매력적인 곳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배우는 일을 멈추고, 기존의 길에 안주했다.
새로운 길을 배우는 일은 좁고 편협했던 시선을 넓혀준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나의 생활권은 직장에 따라 늘 변했는데. 나는 변화에 둔했다.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고군분투하느라 좌우를 살피기보다는 앞만 보고 걸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여의도 부근을 오가며 출퇴근을 반복하자, 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곳들이 조금씩 쉬워졌다. 잠시 인턴으로 작가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집에서 마곡역까지 1시간이 넘게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받는 월급을 모아 여의도 북카페를 찾아갔던 나.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생활이 안정되었고, 버스 노선을 더 효율적이고 폭넓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불확실하게 이리저리 파편처럼 튀었던 꿈도 더 선명해졌다.
지도를 보는 일을 좋아한다. 내가 가본 곳이 확장되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지도에 가끔 내가 들렀던 장소가 뜨는데, 보면 나의 산책길은 시기와 직장, 지내는 곳에 따라 많이 변했다. 어떤 날은 과거로, 어떤 날은 미래를 꿈꾸러, 어떤 날은 마음을 달래러, 또 어떤 날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으로 걸었다. 사람을 많이 만나진 않지만, 돌아다니며 보는 다양한 사람들과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상상력과 생각을 넓혀주었다.
국회도서관 가는 길, 마포대교를 건널 때면 일순간 해방감을 느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신촌 오거리와 로터리에서 환승해야 한다. 신촌은 서울에 상경해 첫 월급을 받은 날, 유명한 책방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편지지를 사서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지 못할 글을 연필로 끄적이던 기억이 남아 쓸쓸하면서도 감성이 충만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리를 알고, 새로운 버스편도 알게 되며 따뜻한 기억을 품은 나만의 길로 변했다.
새로운 길을 알 때마다, 불필요한 기다림보다는 꿈을 꾸며 새로운 도전에 설레는 순간이 많아진다. 앞으로의 길은 어떻게 변할까. 또 다른 길을 걷는 상상을 하며, 나는 마포대교의 물결과 함께 흘러간다. 새로운 책도 접하고, 새로운 꿈도 꾼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방황했지만, 이제는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나의 길은 변하고 있다. 꿈과 함께.
짧은 스케치.
오늘은 국회도서관까지 나들이를 왔다.
새로운 길을 배우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편협했던 나의 시선이 조금씩 흔들리는 순간들이 좋다.
멀게만 느껴졌던 여의도는
어느새 생활권 안으로 들어왔다.
일하는 곳이 가까워지니
시야가 넓어졌다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실은 내가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경계가
조금 옮겨졌을 뿐이다.
나는 지도를 보는 일을 좋아한다.
가본 곳이 늘어나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 위에 특별한 의미를 얹기보다는
그저 이동의 흔적처럼 바라본다.
나의 산책길은
일하는 곳과 지내는 곳에 따라 자주 달라졌다.
어떤 날은 과거에 머물렀고
어떤 날은 미래를 떠올리며 걷는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걷는 날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 위해 걷는 날도 있다.
서울에서 보낸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걷는 길은 여러 번 바뀌었다.
직장이 바뀌면 길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그 사람들과 쌓이는 기억의 결도 달라졌다.
지금 나의 길은 국회도서관까지다.
여의도가 가까워지자
나는 그곳을 거리낌 없이 오가게 되었다.
국회도서관으로 가는 길에는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
잠시 머물 자리를 찾는다.
생활권은 상황에 따라 자주 변하고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진다.
어디까지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에 익숙해졌는지가
그때의 나를 설명한다.
신촌은 한때
마음먹고 2호선을 타야만 갈 수 있는
낯선 동네였다.
신촌역에서 겪은 경의중앙선의 기억과
월급날 위스키를 마시고
자정을 넘겨 기차를 기다리던 밤 때문에
그곳은 조금 스산하고
조금은 쓸쓸한 장소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리를 알게 되고
그 동네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버스 노선을 알게 되자
신촌은 다시 달라졌다.
장소가 변한 것은 아니고
내가 그곳을 다루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 또한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