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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세 Mar 04. 2020

완벽이 아닌 우연이 주는 즐거움

실수라 여겼던 순간들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데려다줬다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냥 좋아서 무작정 시작했는데 색 쓰는 것부터 구도 잡는 것까지 모든 게 낯설었다. 하얀 도화지 앞에서 설레기보다는 두려웠다. 한번 칠하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생각한 대로 그림이 나올까. 혹시 조금이라도 삐끗해서 망치면 어떡하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두려움으로 몰려왔다.


‘두려움은 허상일 뿐!’이라 나를 다독인 결과, 다행히 머리가 도화지처럼 새하얘지기 전에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 붓질을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마음속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일단 한 획을 그었더니 ‘에라이 모르겠다’ 싶어져 과감해지더라. 완성된 그림은 다행히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 작품부터는 조금 더 빨리 첫 터치의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나의 붓 터치는 점점 더 과감해졌고, 부담감을 버리니 오히려 더 좋은 작품이 나왔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흰 도화지 앞에서 어떤 색을 쓸지, 어떤 질감을 낼지 고민했던 순간을 잘 이겨내서일까. 그 과정에서 인생의 소중한 법칙 하나를 배웠다.


바로 ‘우연적 필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처음에 구상했던 그대로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신 그림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영감을 받을 때가 있었다. 순간의 감정에 따라 다른 색을 덧씌우면 그 과정에서 작품이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색과 저 색을 섞어 상상도 못 한 색이 나왔을 때. 실수를 가장한 우연의 순간에 한숨 아닌 탄성이 나왔다. 몇 번의 우연을 접하고, 나는 그러한 순간들을 ‘우연적 필연’이라 부르기로 했다. 머릿속에는 없었던, 계획되지 않았던, 실수라 여겼던 순간들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데려다줄 때. 그 짜릿한 기분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이후 자연스레 그 순간들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인생을 대할 때도 좋은 영양분이 되어주었다. 도화지 앞에서 가졌던 두려움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순간을 만나 설렘으로 바뀌었다. 청춘이라는 새하얀 도화지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실수를 해도, 그 일 때문에 모든 게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이 아닌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시작점에서 두려움 대신 설레는 마음이 먼저 들어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드는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의 경우 완벽한 계획이 흐트러질까 두려워 지레 겁을 먹었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그 두려움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머릿속에만 있는 허상이었다. 즉 일어나지 않은 일인 것이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두려움을, 우연적 필연을 만나는 설렘으로 바꾸는 것뿐이다. 난 앞으로도 인생이란 도화지 앞에서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을 거다. 대신 ‘우연적 필연’의 순간을 적극적으로 마주하며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꿔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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