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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Jan 24. 2023

비밀은 없어






세상은 참 좁다. 세상에 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세상 사는 사람 다 아는 진리 이 두 가지를 다시 또 절절히 느낄 사건은 머지않아 일어나고야 말았다.


알고 지내게 된 친구인 K가 있었다. 남자였으며 그 사람과도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셋이 함께 본 적이 없었으며 그는 내가 K와 막역한 친구 사이인지 모르는 채였다. 그러면서 K 역시 그와 나 사이의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모르고 있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공통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통 너는 걔랑 얼마나 친해? 무슨 얘기해? 이러면서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이 상황에서도 그랬다. 서로서로 알고 지내지만, 각자의 친밀도는 달랐다. 이것이 굉장한 축복이 된 셈이다.     



K와 새해를 맞이하여 가볍게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였다. 그러다 친구이자 동시에 성인 남자인 K에게 답답함을 토로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마음을 접기 위해 고백을 했었다고.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계속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며 묘하게 흘러가는데 대체 뭐냐고도 물었다. 좋은 거냐 아닌 거냐, 나랑 대체 뭘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고도 물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있어?]     


눈치도 빠르지.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공통으로 아는 사람을 주르륵 나열했다.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니지. 그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고.]     


어라라.

그렇다. 대화 중에 굉장히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어 버린 거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니? 순간 무슨 경우인가 싶어 아래턱에 힘이 스르륵 빠졌던 것도 같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사실을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솔직히 털어놓았다. 네가 말한 그가 그 사람이 맞다고. 지지부진한 감정 놀이로 한참 끌었던 관계, 고백 이후 어째 더 연락을 많이 하고 나아가 나에게 넌지시 야릇한 여지를 남기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K에게 그랬단다. 지금 연애 초기인데 6개월간 노력해서 꼬셨다고. 여름부터 지금까지 깨나 공을 들였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K는 그러는 넌 대체 언제부터였냐고 물었다. 자기가 여자친구도 대충 알고 있는데 퍽 당황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만큼 어안이 벙벙했을 K는 헛웃음을 지었다.      


늦여름부터 연락을 주고받은 거 같은데 화들짝 놀란 마음으로 거슬러 보니 그보다 전이었다. 2022년 여름, 대체 그 여름에 무슨 마음을 먹었길래 그는 나와 다른 여자에게 동시에 그랬나. 지난 몇 달간 여자친구로는 다른 여자를 점찍어두고, 나는 그냥 심심풀이 땅콩이나 혹은 어쩌면 한번 ‘자 볼 수도 있을 여자’쯤으로 남겨두려고 그리도 그렇게 자상하게 굴었을까.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K는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다며 위로와 공감, 놀라움 어디쯤에 있는 말을 연신 중얼댔다. 하긴 당사자인 나조차 와, 이게 대체 뭐람. 신나게 놀아나 준 꼴이 된 시간들이 믿기지 않아 어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 내가 체념의 마음으로 고백했을 때, 그러고도 건네는 연락에 반응하고 화답할 때, 하루 끝에 수고했다는 밤 인사를 전할 때마다 우스웠을 거다. 이래도 되네? 이게 되네?라는 생각에 즐거웠을 거다. 우쭐했을지도 모른다. 

거봐, 역시 쉽네. 이 아줌마는 내가 좀만 이래도 넘어온다니까?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잃지 않으려 과자 조각을 바닥에 흘려뒀듯이 그는 내게 언젠가의 외로움을 대체하기 위해 그렇게 여지를 흘려뒀던 거다.     


스페어타이어 하나쯤 있으면 좋긴 한데 그게 사람이, 잠시 연인을 대체할 누군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K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알게 된 사실에 별안간 남아 있던 정도 뚝 떨어지면서 조소가 번졌다. 

어디 감히.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그러면서 더 엮이지 않은 것, 넌지시 전해지던 그의 사인대로 조금의 스킨십이나 사고가 없던 데에 감사함이 밀려들었다.

곧이어 감쪽같이 속이고 숨긴 건 잘해왔는데 세상이 좁고 비밀은 없다는 걸 잠시 잊은 그 아둔함에 응당 사람에게 가지는 일말의 호감마저 싹 가셨다. 그저 밤이 심심해서 거기에 함께 어울려주는 사람이 되고픈 마음이 있다면 모를까. 마음을 바란 거지 몸을 바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역시나 그와 나는 못 되고 안 될 사이인 게 확실했다. 여차저차해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 쳐보자. 각자의 목적이 애초부터 달랐던 두 사람인데 과연? 대화로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을 거다.     

양반은 못 되려나. 수많은 말과 장면이 뒤섞여 어이없는 헛웃음을 픽픽 흘리는데 마침 그에게도 연락이 왔다. 대체 거기에 뭐란 소리를 한담. 

네 여자친구는 너 이러는 거 아니? 냅다 비웃어주며 쏘아붙이고픈 걸 꾹 참았다.     


정나미가 떨어지는 게 이렇게 한순간일 줄 누가 알았을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 천연덕스러운 그를 바라보는 게 고역이며 동시에 즐거웠다. 연애를 못 한다던 자기 어필대로 정말 못 하는구나. 이렇게 또 남자에게 환멸을 느껴야 하는 게 신물 나면서도 우스웠다.

동시에 조상신이 도와서 정체를 깨닫고 정신 차리라는 새해 선물을 준 게 아닐까 싶었다. 만일 그의 미적지근한 유혹에 휩쓸리기라도 했다면. 세상에. 

그런 뒤에 그의 연인이란 존재를 알았다면 들이닥칠 배신감은 또 어쨌으려고. 괘씸한 건 당연했다. 하나 그것보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더 컸다. 다소 끌려다닌 감은 있지만, 더 매달리지 않은 걸 두고 자존심 지킨 일이라 퉁치면 그럭저럭 상처도 없을 에피소드였다.     



K와의 놀랄 노 자의 대화를 마친 뒤, 그의 연인으로 짐작되는 여자의 SNS 제보가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 처음엔 어디 얼마나 예쁜가 보자. 의 마음이었는데 삐뚜름한 시어머니 같은 시선은 잠시였다. 아이를 기르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럴까. 남의 집 귀한 딸인데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마음 아플까. 이입하지 않아도 될 문제에 마음이 쓰렸다. 아직 어리고 예쁜데. 그녀 역시 나처럼 이런 남자인 줄 모르고 6개월을 지켜보다가 마음을 허락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모르겠다만 그녀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별안간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도 화가 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진짜 고민했는데. 나라면 내 남자친구가 내게 대시하는 도중에 동시에 애까지 있는 돌싱의 30대 여자에게 어장관리를 하며 헛소리했다는 걸 알면 다시 남자를 믿고 싶지도 않게 충격을 받을 듯싶었다. 사랑하는 이가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얼추 근처의 감정을 나 아닌 여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며 그렇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데에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하는 것만으로도 안타깝고 괴로웠다.

물론 나는 학을 뗄 정도의 사람을 겪어왔지만 남의 집 귀한 금지옥엽 성인 여성에게, 그동안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상처와 사랑을 받았을지 모를 사람에게 함부로 칼을 날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 중 문제 될 만한 대화와 장면을 캡처해 저장해 두면서 수도 없이 고민했다. 아무것도 모를 그녀에게 이걸 보내, 말아? 

어제 그를 만난 흔적이 역력한데 ‘그쪽 남자친구가 아침부터 연락이 오네요. 그동안 이런 얘기 참 많이 했는데 그랬는데. 그거 아세요?’ 따위의 또라이 상간녀 같은 멘트를 날릴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같은 여자로서 너무 마음이 쓰여서…’ 따위의 말도 그다지 매너 있고 배려 있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무슨 말을 해도 기겁해 놀랄 일이고 유쾌한 내용이 아니었다.           



결국 고민 끝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 얄팍하고 못된 저울질이 저변에 깔린 사랑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란 것쯤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더 잔인하게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여자가 과연 나 하나겠는가? 3명이 될 수도, 4명이 될 수도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매력 있는 남의 집 귀한 딸을 잔뜩 흔들어 놓느라 바쁠 수도 있었다. 빡치지만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그러니 그녀가 어서 그의 맨 얼굴을 빨리 파악하고 더 깊어지기 전에 돌아서길 바랄 뿐이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올 것이다.’     


노자 피셜이라는데 사람 때문에 어이없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 싶으면 카르마를 믿으며 저 말을 복기해 본다. 오래 산 건 아니지만 보통 지어온 업보가 있으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 업보로 발목이 잡히지 않던가. 당장의 앙갚음을 실행하지 않겠다 했지만, 언젠가 업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언젠가 자승자박의 뼈아픔을 겪을 터였다.     


마음 아프지도 않았다. 한 이틀 어이없고 우습고 같잖아서 여기저기 하소연을 좀 하긴 했는데 그 뒤로는 그럴 기력도 없이 사는 게 바쁘고 고돼서 한참 전 일만 같다. 그에게 연락이 왔는데 적당히 선을 긋는 뉘앙스를 풍겼고 그다음 연락이 왔을 땐 ‘읽씹’으로 넌지시 내 의사를 전했다. 뭐 어쩔 거야. 그냥 그가 어서 정신 차리고 꼬시는데 한참 걸렸다는 지금 연인에게 진심을 바쳐 잘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도 이미 늦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도 이혼 후 처음 있던 썸이, 처참하고 초라하며 어이없게 막을 내렸다.      


아무 사건 사고 없고 로맨스도 없고 기약도 후일담도 없다. 원래 인생이 그 모양으로 생겼다. 이만하길 차라리 다행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인연과 스침이 또 어떤 모양과 형태로 내게 기억될지 모른다. 그러니 더 많은 사람을 마음에 담고 보내고 또 받아들일 상태가 된 것에 고맙기까지 하다.     


나는야 럭키 돌싱. 정말 조상신이 도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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