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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el 0

아들의 아스퍼거 진단 - 7

by 앨리의 정원

우리 아이가 미국으로 가게 됐다는 소식이 퍼지자 어린이집 친구 한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미국은 무서운 곳이야. 영어를 잘하면 한국으로 다시 못 와. 그러니까 한국 와서 우리랑 놀고 싶으면 영어 배우지 마.“ 라고 조언했다. 우리 아이는 그 말을 듣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는 부모님을 따라서 미국으로 갔다가 적응을 못해서 조기귀국했고, 영어를 극도로 싫어하게 된 아이였다. 그때는 둘의 심각한 표정과 엉뚱한 대화가 너무 귀엽다고만 생각했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두 달 전 우리 아이를 위해서 급하게 영어 선생님을 수소문했다.

아들이 최소한 알파벳이라도 떼고, 인사하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 아프다 정도만 영어로 말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에 일주일에 3회 영어 과외를 부탁했다.


영어선생님은 네팔에서 온 여자 대학원생이었고, 영국인이 운영하는 네팔 외국인학교에서 12년간 영국영어를 익혔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편안하게 웃어주는 선한 사람이었고, 우리 아이에게 진심으로 영어를 가르쳐 주고 싶어 했다.

우리 아들은 어린이집 친구의 말 때문인지 선생님한테 영어 안 배울 거라면서 도망만 다녔다.

매번 도망치는 아이를 잡아서 앉히는 것이 힘들었던 나는 선생님 앞에서 화를 낼 수가 없어서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했다.

착한 네팔 선생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를 잡아서 앉히고 그림카드, 노래 등으로 어떻게 해서든 알파벳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첫 달 동안 우리 아들은 선생님의 노력으로 알파벳을 겨우 뗐다.


두 달째 접어드니 아이는 선생님을 앉혀놓고 한국낱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가 그림카드를 가리키며 “떤땡님, 사과”라고 하면 선생님은 “apple?”이라고 말했고, 그러면 아이는 짜증을 내며 ”아니 아니, 사과! 사아과아~“라고 선생님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고군분투하는 선생님과 아들을 바라보노라면 선생님이 알파벳을 가르치던 방법을 흉내내는 아들이 놀랍고도 기특했고, 과외비 생각에 아들이 괘씸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노고가 안쓰럽고 감사했다. 결국 두 달째 수업은 선생님의 한국어 어휘 실력이 늘었을 뿐 우리 아들의 영어 실력은 진전이 없었다.


알파벳만 아는 상태로 미국에 도착한 아이는 킨더에 입학하기 위해서 교육청 영어면접을 봐야 했다.

히스패닉 인터뷰어는 우리 아이에게 그림책을 넘기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아이는 질문을 전혀 알아 듣지 못했다.

“Yes”만 연발하는 우리 아이를 관찰하던 인터뷰어는 의미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책을 덮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Level 0을 판정했고, Level 0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로 배정했다.

그 학교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피하라고 알려줬던, 거친 애들이 많이 다닌다는 학교였고,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자리를 뜨는 인터뷰어에게 다급하게 우리 아이가 영어를 전혀 못 하는데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영어를 익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모든 변화때문에 그동안 진전을 보였던 우리 아이가 퇴행할까 봐 두려웠다.

인터뷰어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도 멕시코에서 왔는데 자기 아이도 영어를 전혀 못했지만 6개월 지나니 자기보다 더 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도 6개월만 지나면 부모보다 영어를 잘 할거라고 토닥여주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아이 손을 잡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릿속은 온통 ‘우리 아이는 아스퍼거인데, 영어도 전혀 못하는데, 낯선 교실에 들어가려면 두 달이 걸려야 교실문을 겨우 여는 아이인데..‘하는 걱정과 불안으로 헝클어졌다. 이럴 때 엄마 옆에 있었다면 현명한 조언을 얻었을 텐데, 우리를 보내면서 우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엄마께는 그저 잘 지낸다고만 말씀드렸다. 아이의 아스퍼거 진단 이후로 아이 관련 일들은 오직 우리 부부가 판단해서 선택하고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 지 몰라서 두려웠다.

만약 아이가 안 좋아지는 신호가 감지되면 나만 짐을 싸서 아이를 데리고 바로 귀국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마음이 힘들어서 로컬 성당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미사를 드렸다.

한인성당에 가면 우리 아이가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수군댈까 봐 일부러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로컬성당에 나갔다.

성당 안에서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해방감에 비로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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