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아스퍼거 진단 - 6
우리 아이는 5세에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감통선생님께서 아이를 주일학교나 어린이집에 보내보자고 제안하셨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도 외동이 아들의 사회성 발달을 위해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남편의 직장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직장 어린이집은 셔틀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왔다.
아이와 함께 걷고, 아이가 좋아하는 타요 마을버스를 타고, 아이가 지하철을 타며
새로운 자극들을 편하게 받아들이길 기대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아이는 등원 첫날 교실로 잘 들어갔지만, 이튿날부터 교실 문 앞에서 집에 가겠다고 한 시간을 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마다 다른 아이들 서너 명이 집에 가겠다고 문 앞에서 같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 아이가 제일 마지막까지 교실 앞에서 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침마다 교실 문 앞에서 우는 아이를 바라보며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는지.
‘아이에게 너무 버거운 변화일까, 아이가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까, 아이는 내가 자기를 버리는 것 같아서 불안한 걸까, 여기까지만 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야 할까, 이걸 견뎌내게 해야 할까..‘
결국 담임선생님이 우는 아이를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면 나는 어린이집 근처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서성이는 일상을 반복했다.
3월부터 5월까지 우리 아들은 교실 문 앞에서 매일 울어댔다.
그러다 갑자기 5월 20일경 몇 분 울지 않았는데 팔로 눈물을 쓱 훔치더니
“엄마, 이제 됐어.”라는 말을 남기고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의 모습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안이 벙벙했는데 나는 곧 뛰어오를 듯이 기뻐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울지 않고 교실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섯 살 우리 아이는 교실 문을 열 용기를 내기까지 2개월 정도가 걸렸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엄마들이 우리 아이가 이상하다며 수군댔고, 같은 반 친구들은 우리 아들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은 적응에 느리며 단지 책과 레고를 좋아하는 조용한 아이였지만, 반에서 항상 거의 혼자 놀았다.
날마다 소외당하는 아이를 보며 감통선생님과 같이 걱정하던 차에 남편이 공부 때문에 미국으로 가게 됐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내가 한국에 남아서 아이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오은영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오은영 선생님은 상담실을 둘러보는 아이와 대화하며 관찰하시더니 우리 부부에게 겁내지 말고 온 가족이 함께 가라고 하셨다.
감통선생님도 미국은 아스퍼거 아이들에게 훨씬 더 수용적인 사회 분위기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