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기의 초월과 오늘의 초월
그 시기의 초월과 오늘의 초월
004. 내가 태어난 연도에 출간된 책
사람은 죽어서 무얼 남길까. 영화도 몇 년만 지나도 누군가들에겐 아주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다. 베스트셀러는 금방 스테디셀러가 되거나 진부했던 유행 정도로 치부된다. 새로웠던 건 사라지거나 일상적인 것으로 탈바꿈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만 증명의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이런 생각들이 점점 더 자주 피어나는 것은 나이와 연륜이 차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100권을 읽을 때에는 4번은 '3번 책 작가의 후속작'이었다. 세 번째로 읽었던 책이 하필이면 다자이 오사무의 거진 유작인 바람에 4번 책이 불가능하게 됐다. 어떤 책은 한 사람의 대표작이 되면서 그 생의 마무리를 하기도 하는구나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에는 '연구'라는 단어에 심하게 꽂혀 있었다. 좋아하는 앨범, 좋아하는 작가 따위를 연구하다 보면 취향이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작가 연구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같은 작가를 읽어보려고 한 거였다. 그 시기에는 그저 여러 권으로 나눠진 장편 소설을 연달아 읽는 것에 그치긴 했다만. 그래서 이 번에도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책을 읽어서라도 명맥을 맞춰야 하나 고민을 했다. 한 사람을 알아가기에 한 권은 부족하지 않나? 근데 이 세상에는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 정말 많잖아. 그래서 과감하게 바꾸기로 했다. 내가 태어난 해에 출간된 책. 내가 무얼 남길지 알려면 나와 같은 세월을 살아온 책이 지금 어떤 존재가 되어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해당 시기의 1등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순위권에 노출되던 이 책,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선택했다.
한 장을 읽고 눈치챈 것은 이 책은 시집이라는 것이었고 마지막 장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은 연도가 틀렸다는 거였다. 뭐 어때. 비슷한 해에 출간된 책이니까 괜찮다. 사람도 한국에서는 한 살 더 먹고 미국에선 한 살 내리고 자유자재이지 않나. 책을 고르면서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책이라는 건, 한 번 출간되는 순간 어쨌든 그 쇄 하나는 버려지고 해체되는 순간까지 그대로 정지해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다르다. 사람은 세포의 분열, 분비와 섭취를 반복하면서 변화한다. 책은 2쇄와 재판 같은 진화를 하긴 하지. 다만 작가가 직접 나서서 내용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그대로 정지한다. 시는 더더욱 그렇다.
나와 같은 시기에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활자들은 여기 이 곳 안에 정지해서 오늘날 사람들이 바꾼 세상을 통해 다르게 읽힌다. 예로 '감자와 그 밖의 것들에게'라는 시에서는 거미에게 말한다. "거미에게, / 만일 내가 거미라면 / 그렇게 줄곧 허공에 매달려 / 초월을 꿈꾸진 않으리". 그 시기의 초월과 오늘의 초월은 확연히 다른 의미를 띨 것이다.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쪼개고 쪼개어 더 부지런히 살 것을 강요하는 오늘의 대세를 생각해 보면 이 초월은 근면이라는 허상으로 읽힌다. 이미 근면하게 살고 있는 개인들이 저 너머에 있다고 믿는 시간을 쪼개어 만드는 또 다른 근면. 그게 오늘의 초월이 아닐까? 그 시기의 초월은 무엇이었을까?
시는 모든 구절을 옮겨 적는 것보다 괜히 그 조각으로 있을 때에 더 기록의 의미가 남는다. 통으로 읽다가 마음을 울린 문장을 되새김질하다 보면 전체 시가 뭐였더라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시라는 것이 자신의 문화적 소양을 자랑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때가 있었다. 구절을 올리고 필사를 하던 것이 유행이던 때가. 요즘에는 그때가 그립기까지 하다. 발전적이지 않은 것들을 향유하고 탐구하는 것이 필사적인 삶과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 슬퍼.
[100권의 의미]는 책을 100권을 읽으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그리고 그 책들이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형성하는지 알아보고자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2021~2023년에 걸쳐 100권을 읽은 후 같은 리스트로 두 번째 100권을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