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빌 공’을 써서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는 곳이고, 장소는 ‘어떤 일이 이뤄지거나 벌어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내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집은 내게 공간일까, 장소일까? 한 때 집은 내게 ‘공간’인 적이 있었다. 장소로서의 집은 아이러니하게도 친구 집이나 애인 집이었다. 그곳에 있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존재하는 것이었다. 내 집에 있으면 나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우울에 침잠해서 이부자리 밑으로 계속, 계속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 집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지금까지 내 집은 무기력증 때문에 지저분했다. 쓰레기로 바닥이 가득 차 발 디딜 곳도 없었고, 군데군데 음식찌꺼기가 묻어 말라 비틀어진 건 예삿일이었다. 무기력증이 왜 나았는지는 모르겠다. 꾸준히 약을 먹고, 꾸준히 상담을 받다보니 나아졌나, 어느 날 갑자기 집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쓰레기들을 버리고, 묻어있는 음식찌꺼기를 닦아내고, 청소기를 돌리고, 옷들을 세탁해 옷걸이 걸어주고. 그렇게 해주고 나니 깔끔한 방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청소에서 그치지 않고 향수를 뿌리고, 간만에 좋아하는 꽃집에 가서 꽃다발을 사와 꽃병에 꽂아놓았다. 내가 원치 않던 결과물로 채워지던 방에 내가 의도한 것들이 들어서니 그제야 방이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집이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 내 욕망에 충실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쓰레기장이 된 방이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던 것처럼, 당장의 편리함을 위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을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일이 이뤄지거나 벌어지는 것’의 주체가 내가 될 때, 장소에는 장소를 가진 사람의 의지가 담긴다는 선생님의 말을 상기하게 된다. 더 이상 내 집에 내 가짜 욕망이 들어차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내 집은 이제 공간이 아니라 장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