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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Dec 12. 2022

궤적

001.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나는 누구와도 사귈 수 있었다. 그만큼 좋아하는 아이가 자주 바뀌었다는 뜻이다.


  처음 좋아한 아이는 같은 밴드부의 아이였다. 베이스 기타를 치던 아이. 좋아한다고 내 마음이 결정되기도 전에 알아버렸다. 그 애는 다른 아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부단히도 그 아이를 닮고 싶어 노력했던 것 같다. 왈가닥 스타일의 나와 조곤조곤한 스타일의 그 아이. 그 아이를 따라하다보면 안 맞는 옷을 입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지만, 네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그 불편함이 간지러움으로 바뀌곤 했다. 너를 사랑하는 나는 이만큼이나 노력하고 있어, 하며 뿌듯해했다. 그 노력에도 우리는 이뤄지지 못했다. 나는 그럼에도 '그 아이'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아무리 똑같이 행동해도 본질적으로 그 아이와 나는 달랐으니까. 그 아이와 나 중에 너와 나눈 시간은 확연히 차이가 났으니까. 나는 그 아이만큼 너랑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사랑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이밍 같은 운이 따라줘야 함을 깨달았다.


  그 다음으로 좋아한 건 비올라를 전공하던 선배였다. 음악을 전공하는데 공부까지 잘한다고 해서 호기심으로 관찰하던 선배였다. 친구가 그 선배랑 친해 나에게 소개시켜줬는데, 친해진 이후로 안 선배는 참 장난끼가 많았다. 급식을 기다리면서 학년이 달라 엇마주칠 때 턱을 간지럽힌다거나, 지나가다 마주치면 머리를 쓰다듬고 간다거나. 그래, 솔직히 짝사랑의 원인은 저런 스킨십도 한 몫 했을 테다. 장난끼로 치부될 수는 없는 것들임을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장난끼로 치부 됐어야만 했던 건, 선배는 나랑 사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익명 제보로 고백을 했을 때에도, 이미 마음을 알고 있지만 받아줄 수 없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나인 줄은 어떻게 알고. 나도 그게 나임을 알고 답장한 것인지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믿었다. 나임을 알고 답장한 것이라고. 그냥 나는 장난감이었을까, 그냥 아끼는 후배를 대하는 방식 중 하나였을까, 알 수가 없지만 이젠 너무나도 멀어져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이 짝사랑은 내게 조금은 아픈 사랑이었다.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닿지 못한 사랑이라서. 그러나 그때의 내 피해의식 짙은 성격을 생각해보면 사귀었으면 더 안 좋게 헤어졌을 것 같다. 애인에게 갖는 열등감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고 외롭게 만드는지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짝사랑을 중간중간 하면서 연애도 했지만 짝사랑만 언급하는 것은, 연애는 어떻게든 결말이 지어졌지만 짝사랑은 결말이 나지 않아 자꾸 이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의 늪에 빠지기 때문일 것이다. 열린 가능성의 장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짝사랑에 얽매이게 되는 것 같다. 연애로 이어지지 못한 원인을 찾다보면 어느새 다시 짝사랑에 대한 회고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그때 했던 ‘이랬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생각을 수정하는 밑거름이 된다. 내가 못나서일 수도 있었겠지만, 되도록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냥 운이 따르지 못해서, 타이밍이 어긋나서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002.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짝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고, 사랑받는 내 모습이 신기하고. 짝사랑은 하는 경우도 있지만 받는 경우도 있으니까.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나도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해서 자신은 거절해도 되지만 거절당하길 싫어한다. 내가 그랬다. 변명 같지만 꼭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었어도. 


  어디서는 이것이 자기혐오의 연장선이라고 했다. 자기를 너무 싫어하는데, 내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상대가 이해가 안 되는 거라고. 자기혐오의 연장선이라기엔 나는 나를 너무 좋아했다. 그게 왜곡되어서 그렇지. 남들보다 잘났다는 자존심이 있었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자기혐오라고 치부하기엔 내 안에서는 풀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자기혐오라면, 왜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걸까?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이 사람의 마음이 떠나는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처음부터 차단한 것 같다. 발전해서 언젠가 사귀게 되면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영원토록 유지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대부분은 헤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나는 그걸 견딜 수 없었던 거다. 근데 이게 정확한 이유는 아니다. 그냥 그렇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다. 아직도 잘 모른다. 내가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준 경우인 지금의 애인과 그동안의 날 짝사랑하던 사람들 간의 차이도 모른다.


  아니, 알겠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내 모든 모습을 보여주고도 사랑받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동시에 나의 못난 모습에 엄격했다. 안 좋은 것은 항상 조부모 탓을 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나는 사랑받아야 할 시절에 사랑받지 못하고 항상 어떠한 모습이 되길 요구 받기에 급급했다. 나를 좋아해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때의 나는 사랑받는 법을 몰랐다. 당신이 싫거나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그냥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 길을 당신과 헤쳐나갈 수 있다는 상상을 할 여유도 없었으니까. 당신에게 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도 나에게 지쳐 떠나가는 게 무서워 함께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야 말하지만, 이런 시절을 보냈기에 당신과 사귈 수 있었다. 이런 시절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해답을 얻진 못했어도 어떻게 살진 말아야겠구나 하는 교훈을 얻고, 인생의 항로를 계속 수정하고 나아가고 수정하고 나아가길 반복해서 당신께 닿았다. 엄마 몰래 다락방에 숨어서 키득거리며 전화를 주고받다가, 당신께 고백을 해야지 결심하던 날을 생각한다. 왈칵 눈물이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용기가 안 나서 그랬던 것 같다. 머릿속으로는 더 이상 누군가 나를 버린다는 게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설령 버린다고 해도 어린 시절처럼 버려진다고 내 처지가 아주 나빠지는 건 아님을 알아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을 걷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럼에도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내 뱉었고, 울면서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고백을 했지만, 그만큼 당신이 좋았다.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만 같아서. 주치의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린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했지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또 버리진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당신께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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