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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Jan 31. 2023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




우리는 이런저런 유토피아에 빠져서 현재를 잃어버린 존재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은 스웨덴의 정치가 비그포르스가 창안한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나왔다. 사회주의나 총파업 같은 파국적인 경로로 혁명적인 희망을 제시했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혁명적인 복불복'뿐이었다. 그 예측불가능하고 위험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유예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런 저런 유토피아에 젖어 현재를 방기하고들 있지 않은가? 비그포르스는 스웨덴을 천년왕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스웨덴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에 우선순위를 두기로 했다. 1919년 예테보리 강령에는 구체적인 실행방안들이 제시되었다.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 전국단위 의료보험, 출산 및 양육수당, 주택건설의 공공지원, 압도적인 누진적인 재산세와 상속세, 자본과세, 은행 및 보험사의 사회화, 산업현장의 노동자 경영참여 등등.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은 쉽게 말하자면 '현재 구하기'와 같다. 인간이 현재를 얼마나 허망하게 방기해버리는지는 철학자 파스칼이 날카롭게 꼬집었다.




허망한 우리는 이미 없어진 시간을 생각하지만 현존하는 유일한 시간을 무심히 놓쳐 버린다. 그것은 대체로 현재가 괴롭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를 외면한다. 그것은 현재가 참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가 즐거울 때에는 그것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긴다.
파스칼 『팡세』


미래에 휘둘리고 과거를 잊지 못하며 끌려다니며 현재를 살아갈 줄 모르는 인간들을 공자는 '비열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했다.


공자가 말했다. 비열한 인간이 윗사람을 잘 섬길 수 있다고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그는 걱정인형이다. 갖고 싶은 것이 아직 손에 없을 때는 없다고 걱정하고, 설령 그것을 어찌저찌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잃어버릴까 걱정한다.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게 정도를 넘어서니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도 저지르고 만다.
『논어』 「양화」 편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공자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가장 의지했던 제자 자로가 귀신 섬기는 방법을 묻자 산 사람을 섬기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귀신 섬기는 방법을 배울 필요 있겠는가 하고 일갈했고, 말귀를 못 알아먹은 제자가 이번에는 죽음에 대해서 질문하자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배울 필요 있겠는가 하고 결정타를 먹인다. 위나라에서 공직 생활을 하고 있던 자로가 5.16 또는 12.12 같은 군사반란 조짐에 초조해 하면서 죽음과 귀신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었지만 공자는 자로가 사는 길에 더 집중하길 바란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은 '차악의 시나리오'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데미지를 받았다면 그대로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재아가 노나라 임금인 애공에게 자문을 하다가 실언을 한 적이 있다. 재아는 중국 고대의 신주(神主 : 위패를 뜻하며 '회사' 할 때의 '社'라는 글자의 뜻)를 만들 때 사용했던 나무의 뜻을 설명했다. 요즘 말로 비유하면 '꽃말'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오래 된 하후씨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은 잣나무를 썼고, 바로 직전 제국인 주나라는 밤나무를 썼는데, 밤나무는 한자로 '율栗'이었다. 이 글자가 '몹시 무섭거나 두려워 몸이 벌벌 떨림'이라는 뜻을 가진 전율(戰慄)과 비슷하기에 백성들을 두렵게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썼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백성들이 왕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고, 애공은 '공포정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공자는 제자의 실언을 인정하면서 더 이상의 논란을 만들지 않았다. 재아의 말을 넌지시 억누름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이라 논쟁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 탓하지 않는다
『논어』 「팔일」 편



만약 공자가 제자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면 다른 방향에서 반론이 제기되면서 정치 논쟁으로 번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는 살얼음판 같아서 말이 어느 방향으로 튀는가에 따라서 정책 방향이 결정되고 국민의 운명이 큰 영향을 입기 때문에, 도지사는 '정무부지사'를 두고, 당대표는 '정무실장'을 두면서 메시지 관리를 한다. 공자 역시 일종의 메시지 관리를 한 셈이다. 공백료라는 사람이 노나라 제1실세 계손씨에게 자로에 대한 비방을 퍼뜨렸을 때도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가 실행되었다. 공직에 있었던 자복경백이 자신의 직권으로 공백료를 처형시키겠다고 말했지만 공자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며 도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천명이니, 공백료가 천명을 어떻게 하겠는가?
『논어』 「헌문」 편


만약 자복경백의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디스토피아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다. 물론 자복경백은 공백료를 처형함으로써 화근을 없앴다고 생각하겠지만 노나라 정가에서 그렇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디스토피아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다. 공자는 공백료의 입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불리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서 일단 인정하고, 그것이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었다.



일상에서 '잠정적 디스토피아' 실천하는 방법


나는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와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을 실생활에 적용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떨궜다. 내겐 정말 유용한 개념이었다. 만약 돈 100만원을 잃어버렸거나, 갑작스런 손해를 보았거나, 접촉사고가 나서 피해를 봤을 때 사고가 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사고로 인한 2차 3차 피해를 막는 것은 가능하다. 주식투자를 할 때 큰 손해를 보았다면 손절함으로써 2차 3차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결국 매도 판단을 내리지 못함으로써 손해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휘둘리고 미래에 끌려가기 때문이다. 일단 벌어진 손해를 인정하고 그것이 '디스토피아'로 확대되기 전에 끊는 것이 잠정적 디스토피아의 핵심이다.


나는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을 사람에게도 적용한다. 어떤 문제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특히 그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맥락이 존재한다면 캐릭터 분석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가 할 것이 예상되는 행동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의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예컨대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구멍이 어느 쪽에도 없다면 '지연시키기' 작전을 실행한다. 어차피 관계가 악화되는 것만 남아 있다면 악화를 최대한 늦추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데에는 내 몫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에서 지연 작전을 쓰면 디스토피아로 치닫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에서 갑자기 유토피아로 방향을 트는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의 또다른 죽음이나 비극적인 사고를 통해서 전환점이 강제로 마련이 되지 않고서는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만약 나의 슬픈 예상이 틀렸다면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공자의 잠정적 디스토피아 개념은 '헛된 희망'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거꾸로 관계가 개선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계산한다. 대개는 관계가 개선될 조건들이 거의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그 사람이 나이가 많을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슬픈 시나리오는 현실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관계가 개선될 확률을 0%로 잡은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고 속도 편하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이가 어리다면 변화 가능성은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나이대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가 지금은 초등학생들과 주로 대화를 하고 있다. 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 안에서는 '슬프지 않은 예감'을 경험할 수 있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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