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상황 인식에 대한 좋은 참고 자료는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다. 그 논쟁의 핵심은 이어령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문인들의 두려움을 엄살이라고 치부한 데 비해, 김수영은 문인들을 소시민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조건의 억압성을 문제삼았다는 데에 있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지난 연말에 「우리 문화의 방향」이 실린 같은 신문에 게재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이라는 시론은, 우리나라의 문화인의 이러한 무지성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준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그 당시의 문학이 정치 삐라의 남발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해서 그 책임이 그 당시의 정치적 자유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부의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문화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그 폐해를 과대하게 망상하는 것은 지극히 소아병적인 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그는 (중략) 해방 직후와 4.19 직후를 예로 들면서, 정치적 자유의 폭이 비교적 넓었던 시기의 문화현상을 <자유의 영역이 확보될수록 한국문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화하여 쇠멸해 가는 이상한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무모한 일방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지극히 위험한 피상적인 판단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라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작품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의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