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승주 작가 Feb 28. 2023

이어령 1주기에 생각하는 이어령-김수영의 '에비 논쟁'


이어령 1주기에 맞춰 국제 학술대회와 기사, 단행본이 밀려든다. 그 중에서 내 눈에 띄었던 것은 '김수영-이어령' 지상논쟁을 다뤘던 교수신문 기사였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김수영의 상황 인식에 대한 좋은 참고 자료는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다. 그 논쟁의 핵심은 이어령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문인들의 두려움을 엄살이라고 치부한 데 비해, 김수영은 문인들을 소시민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조건의 억압성을 문제삼았다는 데에 있다.
「전복의 혁명아 4·19 세대, 자유주의 외치다」


신문 칼럼과 문예지 지면 등을 통해서 펼쳐졌던 지상논쟁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김수영 산문전집』에서는 세 편의 글에서 논쟁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논쟁이 펼쳐진 시기는 1968년 1월~3월 3개월 동안이다. 물론 이어령 교수의 비판에 대한 김수영 시인의 주장이기 때문에 한계는 있겠지만, 김수영 시인의 글을 통해서 쟁점을 찾을 수 있다. 글은 「지식인의 사회참여」,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사유」,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에서 볼 수 있다.



지난 연말에 「우리 문화의 방향」이 실린 같은 신문에 게재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이라는 시론은, 우리나라의 문화인의 이러한 무지성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준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이 근대화해 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작업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수영의 글에서 강조된 낱말은 '단견'과 '피상적'이라는 것인데, 젊은 비평가가 현상 진단을 진지하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문학이 정치 삐라의 남발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해서 그 책임이 그 당시의 정치적 자유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부의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문화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그 폐해를 과대하게 망상하는 것은 지극히 소아병적인 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그는 (중략) 해방 직후와 4.19 직후를 예로 들면서, 정치적 자유의 폭이 비교적 넓었던 시기의 문화현상을 <자유의 영역이 확보될수록 한국문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화하여 쇠멸해 가는 이상한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무모한 일방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지극히 위험한 피상적인 판단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실험적인 문학의 자유」


작가의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사회적인 구조와 억압을 소홀히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가난해진 것이 개인들의 '노오력'이 부족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는 비판과 닮았다는 점에서 나는 이어령의 탈정치성과 자기계발적 성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이어령 논쟁은 '에비 논쟁'으로 부를 만하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아민 그레더 그림책 『섬』의 한 장면. 이 그림을 보면 '에비'가 생각난다


이어령은 한국 문단의 작가들이 일종의 '자기검열 기제'를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면서 막연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에비'라는 단어를 꺼냈다.


'에비'란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즉 '에비'라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니라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복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김수영 산문전집』, 「지식인의 사회참여」


이어령의 '에비' 비판에 대해서 김수영은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가상적인 금제의 힘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이며,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라고 항변했다. 이어령의 주장에 대해서 김수영이 짜증을 내는 부분은 명확한 형태가 없다는 점이다. <질서는 위대한 예술이다>라는 언사는 '정치권력의 시정구호'로서는 알맞지만 문학의 백년의 대계를 세워야 할 전위적인 평론가가 내세울 만한 기발한 시사는 못 된다는 김수영 시인의 비판이 그러한데, 그 중 압권은 아래와 같다. 이 논쟁 과정에서 김수영은 이어령과 완전한 결별을 한 듯하다.


그는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의 서두부터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바로 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비난하고 있는데, 이런 비난은 누구의 어떤 발언이나 작품이나 태도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중대한 말을 실제적인 예시도 없이 마구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는 내가 말한 나의 발표할 수 없는 시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발표할 수 없다고 한 나의 작품은 나로서는 조금도 불온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그런데 이어령 씨는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을 기관원도 단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불온하다고 단정을 내림으로써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불온하지 않게 통할 수 있는 문화풍토를 조성하자는 나의 설명을 거꾸로 되잡아서, <불온하다고 보여질 우려가 있는 작품>이 바로 <불온한 작품>이니 그런 문화풍토가 조성되면 문학이 말살된다고, 기관원이 무색할 정도의 의망상을 하고 있다. 이런 망상은 문학이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김수영 산문전집』,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기사를 검색해 보니 김수영 시인 50주기인 2018년에 이어령 교수의 발언이 소개돼 있었다.(김수영 50주기, 이어령의 회고 “누운 자리 달랐어도 같은 꿈 꿨을 것”)


“돌이켜 보면 논쟁 과정에서 절친한 사이인 김수영 시인과 인간적으로 멀어졌던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이어령 교수의 발언을 미루어 보면 이 논쟁 이후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세상에 내놓아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꿈꿨던 김수영 시인으로서는 젊은 비평가 이어령의 피상적인 비판이 몹시 부당하고 불쾌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김수영과 조지 오웰의 글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이어령의 글이 다소 한가하게 느껴진다.



김일성 만세 / 김수영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韓國의 言論自由의 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년 김수영 <김일성만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