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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란>이 처음 하는 이야기

10월 30일 제주 롯데시네마 연동 <한란> 시사회를 다녀오고 나서

by 오승주 작가


제주4.3의 일반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성격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군사보호구역에 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제주4.3이라는 정신적 군사보호구역은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이었다.

'숙군' 이후 대량 학살 피해 지역은 반영구적으로 정신적 군사보호구역, 즉 기억의 군사보호구역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커다란 철조망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란>에 나오는 군인들의 다양한 면모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10월 30일 제주 롯데시네마연동에서 벌어진 한란X뭐랭하맨 시사회에는 김향기 배우와, 김민채 배우가 총출동해 산에서 굴러떨어지고 추락하는 격한 액션 장면 등 뒷이야기를 밝혔다



인간은 한 겹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주4.3의 여러 순간들에 등장한 군인도 한 겹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군인들도 있다.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한 군인이 아닐지라도 당시 9연대 병사들 중 제주출신들은 무고한 주민의 희생을 막으려 애쓰기도 했다. (4.3은 말한다 4권)



<한란>에서는 제주 출신 9연대 병사가 자수 작전에 말려들어서 산에서 내려온 ‘삼춘’들을 되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현장을 육지 출신 중사가 급습하고 9연대 병사를 권총으로 사살한다. 그리고 중사의 부하는 자수한 양민을 잔악하게 학살한 자기 동료들을 모두 사살해 버린다.


하명미 감독은 10월 30일 제주시 롯데시네마연동에서 벌어진 GV시사회에서 “오로지 인간에 집중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화 <한란>은 초토화작전 당시 겨울 한라산에서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서 목숨 건 모험을 하는 어린 딸과 엄마의 쟁존 투쟁기다. <신과 함께> 김향기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그들의 꿈은 그냥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다. 비상 상황이고 계엄령 시국에서는 사치스러운 소망이 되어 버린 가혹한 상황에서 어린 해생이가 실어증에 걸리면서도 엄마를 찾고, 낫는 과정이 감동적인 이야기다


실제로 <한란>에는 다양한 인간 유형들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저마다의 ‘선’이 있고, 그 선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상식적인 선이다. 하지만 선이 무너지면서 사건이 엉키고 엄청난 문제가 발생한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군인이 동료들을 몰살한 장면은 선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어떤 문제가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시퀀스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무장대’라고 부르는 유격대 3인방이 등장하는데, 마르크스 사상에 경도된 교조주의자로서 아진의 남편을 살해한다. 남로당의 사정과 마르크스주의에 빠진 교조주의를 꽤 비중 있게 그렸고 아진과의 토론을 통해서 그들의 실체를 드러냈다는 것도 일종의 금기를 깬 장면이었다. 이 대목에서 감독은 영리한 연출을 보인다.


극우 반공주의와 마르크수주의, 남로당을 마치 ‘사물’로 다룬 것이다. 이념은 ‘선’에 포함되지 않는다. ‘선’은 오로지 ‘사람’과 관련된 것에서만 작동한다.

<한란>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을지 섵불리 예견하기는 어렵지만, 제주4.3이 영화적으로 꽤 깊이 있게 표현되었고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금기와 ‘여러 겹의 군인’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나는 좋은 평가를 주고 싶다. 여순과 4.3의 과정에서 이승만은 ‘숙군’을 단행했고, 그것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쿠데타로 이어졌다. 군내 민주주의와 토론은 수십 년 퇴보했고, 그 과정에서 뜻 있는 군인들의 소리 없는 죽음들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영화나 소설 등으로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GV에 참석한 김향기 배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세상에 대해서 말해달라는 관객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은 토론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한란> 증정품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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