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글을 잘 쓰기 위한 세 가지 조건으로 삼다 즉 다독, 다작, 그리고 다상량을 거론해 왔다. 북송의 문인인 구양수 이래로 이 삼다는 마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으레 지켜야 하는 불문율처럼 인식될 정도였다. 삼다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또 많이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순서를 새로 배열해야 할 것 같다. 다독, 다상량, 그리고 다작이 되는 게 맞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다독, 다상량, 그리고 다작 또는 다독, 다상량, 그리고 다작의 순서로 배치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한편 누군가는 책을 읽으려면 한 권을 읽더라도 정독이 올바른 독서법이라고 한다. 정독은 꼼꼼히 읽는 것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정독하면 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책을 읽느냐며 다독이 정독보다 글쓰기에 유용하다고 한다. 물론 다독과 정독이 서로 반대 개념인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다독은 글쓰기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다독은 글쓰기에 백해무익하다는 말까지 했다. 누구의 말이 옳건 간에 글을 쓰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책 읽기와 글쓰기가 서로 유사한 활동이라고 믿었다.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온다. 용기를 내어 이런저런 글을 써 본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내 배경지식이 부족해 글을 쓰기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독서와 창작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는 활동이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의 정의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글을 쓰면 쓸수록 이 두 가지 활동은 엄연히 다른 활동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독서는 작가가 창조해 놓은 어떤 세계를 독자가 해석하고 그 속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이다. 명백히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있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독자는 자기가 읽고 느낀 대로 내면화할 뿐이다. 작품은 하나라고 해도 그 해석은 다양한 이유가 되겠다. 그 점에선 다분히 능동적인 활동으로 보여도 제공된 책과 그 텍스트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선 다분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글쓰기는 전 과정이 능동적인 활동이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두 가지 활동의 병행은 가능하나, 완벽한 의미에서 동등한 성취를 얻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다독과 다작이 똑같은 비중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뜻이다. 우격다짐으로 '1일 활동 총량의 법칙'을 설정해 보자.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하려고 해도 드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한정되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하루라는 시간 내에 글도 쓰고 책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다독도 할 수 있고 다작도 가능한 방법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도 '다독-다작'이 아니라 '다독-소작' 또는 '다작-소독'이 될 수밖에 없다. 똑같은 시간을 들여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이다.
다독과 다작은 결코 같이 갈 수 없는 활동이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절반씩의 분배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가령 나 같으면 하루 중 세 시간 동안 책을 읽고, 세 시간 동안 글을 쓰겠다는 따위의 다짐이 통할 리가 없다는 뜻이다. 만약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한 시간 반을 들였다면 딱 그만큼의 시간 동안 책을 덜 읽게 되는 법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당연히 글을 덜 쓰게 되고, 더 많은 글을 쓸 생각이라면 책을 많이 읽으려는 생각은 접어야 하는 이치다.
시간만 나면 글을 쓰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을 포기해야 할까? 여간 고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