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 없는 한 해

by 다작이

2024년은 대구시에서 고독사 없는 한 해를 만들겠다고 선포한 해였다. 평소 말만 들었던 고독사라는 그 낱말에 대한 무게감이 확 와닿았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기에 저런 슬로건이 다 나올까 싶었다. 설마 단 한 건의 고독사가 없을 수 있을까? 그저 이전의 통계치에서 확실히 줄이겠다는 뜻이겠다. 찾아보니 2023년 한 해만 해도 1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독사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분명 그들에게도 한때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돌아가시던 그때에 그들의 가족은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고독'이란 낱말이 덧입혀지니 어쩐 일인지 암울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업의 성공 여부를 떠나 사회복지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거나 그러고서 1년이 지났다. 과연 그 사업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조금이라도 그 실태를 줄이는 데에 일조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았을까?


모두가 알고 있듯 고독사는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세상만사의 이치라고 해도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모두의 축복 속에 와 놓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그 쓸쓸한 길을 떠나게 된다. 현실이 이러하니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중장년층이 노년층보다 '고독사' 위험군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고독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연로한 사람뿐만은 아니란 얘기다.


원래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음의 가장 이상적인 장면은 가족이 둘러앉아 임종을 지켜보고 유언을 나누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의 임종을 지킬 사람이 없다. 자식이 엄연히 살아 있으나 어디 사는지 연락도 닿지 않고, 바쁜 생업을 핑계로 혼자 사는 부모를 방문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사후 처리 문제로 연락을 넣으면 무연고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는 자식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행복한 죽음이라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이만큼 비극적인 죽음도 없을 정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우연히 집에 들렀다가 저혈당 쇼크로 쓰러져 계신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한 탓에 병원에 옮겨 적절한 치료를 받아 그 당시에는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어쩌면 의사들이 하는 흔한 말일 수도 있으나, 조금만 늦었다면 생명을 위험할 뻔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된 채 며칠이 지나버리면 그게 바로 고독사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생각은 자연스레 내 노년에까지 이른다. 언젠가 때가 되면 아들과 딸이 결혼하게 될 테다. 요즘 세상에 자식 내외와 합가해 사는 건 기대도 할 수 없다. 물론 나 역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어디 적당한 곳으로 집을 옮겨야 한다. 둘 중 누가 먼저 가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먼저 죽는다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만약 아내가 먼저 가고 내가 남았다면 그때부터 나는 고독사의 위험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셈이다. 물론 지금의 아내와 언제까지 살게 될지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은 바뀔 수 있다.


고독사, 예방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늙어보지 않은 이상 이 문제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설령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노년을 대략 20년 정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생각이 점점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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