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일 차
책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방금 전에도 번화가에 있는 대형 오프라인 서점을 다녀왔는데, 눈 가는 곳마다 온통 책뿐이었다. 게다가 신간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 이름으로 된 책 하나 발간하는 게 작은(?) 소원이기도 한 내 입장에서 봐도 기껏 책을 발행해 봤자 저 많은 책들 속에 묻혀 이름 없이 사라질 책이 아니겠나 싶을 정도였다. 어쨌건 간에 그중에서 대체로 우리가 읽을 만한 책을 들라면, 시, 소설, 수필, 자기 계발, 인문학, 그리고 글쓰기 관련 책 정도를 떠올려 볼 수 있을 테다.
먼저 시를 읽자니 지나치게 관념적인 탓에 읽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스토리와는 무관한 장르다 보니 읽어도 그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데다 까놓고 얘기해서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도 없다. 어쩌면 특출한 시적 재능이 있지 않는 한 시어 자체에서 오는 난해함을 극복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소설을 잘 쓰려면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정작 그럴수록 어지간해선 시집에 손이 가지 않는다.
반면에 소설은 스토리가 눈에 쉽게 드러나 읽기가 편하다. 어느 정도 책 읽기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소설책 한 권 읽는 것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다만 더러는 시처럼 관념적인 소설도 있어서 별생각 없이 책을 골랐다가는 낭패를 당할 때도 있다. 게다가 대체로 한 호흡에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요즘처럼 바쁜 현대인들이 막상 집어 들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소설을 가장 좋아하고 언젠가는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인 나조차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어쩌면 소설을 읽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수필은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르의 책이 아닌가 싶다. 수필은 말 그대로 붓가는 대로 쓴 글이니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최대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겠다. 마찬가지로 붓가는 대로 쓴 글이니 특별한 기술이나 요령 없이도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는 글이 사실 수필이기도 하다. 물론 전문적인 수필가들은 지금의 내 말에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 어떤 글이든 쓰기 쉽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한편 읽기가 수월하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언뜻 자기 계발 서적이 떠오른다. 이 자기 계발 서적에는 다양한 하위 분야를 포함하고 있다. 재테크, 주식, 투자, 애완동물 기르기, 취미 활동 등의 셀 수 없이 많은 분야를 아우를 수 있고, 특히 우리 같으면 무시할 수 없는 게 바로 글쓰기를 다루는 책들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요즘 시중에 마구 쏟아져 나오는 이런 류의 책들은 어딘지 모르게 꽤 교묘하게 수필인 양 행세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도서관 서지 분류 상 이런 류의 책들이 수필에 속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찾다 보면 대체로 에세이류에 포함되어 있는 걸 보곤 한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명색이 수필은 문학의 4대 장르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 말은 곧 문학성을 내재하지 않는 글은 수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글쓰기 책들을 포함한 다양한 자기 계발 서적을 묶어 에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당당히 에세이라고 명시되어 출판하기도 한다. 무슨 말장난 같은 얘기냐고 하겠지만, 모든 것에는 명확한 경계가 필요한 법이다. 수박과 호박이 다르듯 자기 계발 서적과 수필은 엄연히 다른 경계 안에 있는 것들이다.
가끔 글쓰기 관련 책을 인문학 서적으로 소개하는 걸 볼 때가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했을 때 글쓰기 책은 사색이나 성찰을 목적으로 하는 책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특정한 사람들, 즉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쓴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썼다면, 그건 곧 자기 계발 서적이 되는 것이다. 글쓰기 책이 인문학 서적이 될 수 없는 명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이면 그냥 펼쳐 읽으면 되는 것이지 뭘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 모든 것에는 다 그만한 요소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각 책들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