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집을 나서기 전 대청소

126일 차

by 다작이

어제 잠이라도 실컷 자려고 커튼까지 꽁꽁 치고 잠에 들었는데, 막상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근심이 있으면 몸도 편할 리 없다는 게 맞는 말인 듯했다. 자다가 깨다가, 자다가 깨다가를 몇 번 반복한 뒤에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피 같은 시간, 황금 같은 휴일에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어젯밤만 해도 오늘 일어나면 몇 시에 어딜 가서 뭘 하겠다는 둥 작은 계획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왕 이렇게 되고 만 거 좀 더 쉬자며 집에 눌러앉아 버리는 순간 오늘 하루는 고스란히 날아가게 된다.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을 꾸렸다.


일단 거실에 나와 앉았다. 최소한 일이 분쯤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25년의 긴 결혼 생활이 내게 남긴 지혜라면 지혜다. 나가고 싶다고 해서 언제든 나가 버리면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그만큼 고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으레 휴일 아침이 그렇듯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산더미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방법은 없다. 흙을 한 삽 한 삽 떠서 옮겨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직도 머릿속에선 더 자고 싶다, 안 된다 지금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라는 두 생각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 잔 타 마셨다. 이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업 주부가 아닌 다음에야 집안일을 급한 마음에 밀어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가면 마구 뒤엉켜 버린다. 자칫하면 실컷 했던 일을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엉덩이를 식탁 의자에서 떼는 순간, 양 소매부터 걷어올리고 덤벼들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이른 시간에 집에서 나오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요즘은 뭐 어쩔 수 없다. 내 아버지 세대야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며 애써 외면하던 게 당연하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면 얼마 못 가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쫓아내는 수고도 하지 않을 테다.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고 있으니 정 답답하면 본인의 발로 나가 버리면 그만인 시대다. 그 오랜 옛날이 그립다는 뜻은 아니나, 세상이 그만큼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늘그막에 혼자 하릴없이 방바닥에서 뒹굴며 살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기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먼저 시간을 들여 설거지를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개운했다. 그런데 그 개운한 기분이 얼마 가지 않았다. 음식물 잔류물이 집안에 악취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비닐에 이중으로 담아 밖으로 물기가 새는지 확인한 뒤에 내다 버리려고 하던 찰나에,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용도실에 들어가 보니 역시 재활용 쓰레기도 넘쳐나고 있었다. 참 신기한 게 버린 게 사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 또 저렇게 다 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좋게 보면 이 집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지만, 어째 그 흔적이 꽤 요란한 것 같았다.


그다음은 거의 자동으로 진행된다.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를 일단 현관문 앞에 가져다 두고 한 번에 나갈 때 처리하려면 종량제 비닐봉지도 묶어서 내놓아야 한다. 온 집안의 쓰레기를 다 모은다. 아들과 딸 방의 작은 쓰레기통을 비우고, 화장실 두 곳에서 나온 쓰레기도 묶어야 한다. 청소를 자주 하거나 특히 종량제 비닐봉지를 전담으로 묶어내다 보면 생각보다 종량제 비닐봉지가 너무 비싸다는 걸 알게 된다. 한 번에 배출할 때 비닐봉지가 터질 정도로 꽉꽉 채울 수밖에 없다. 이것도 다 돈이다. 이런 돈을 우습게 여기면 나중에 고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파트 1층 앞마당에 마련된 쓰레기 분리 배출소에 모든 쓰레기를 내놓고 올라오니 또 한 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창문이라는 창문은 다 열어 환기를 시켜야 할 차례다. 청소기를 구석구석 돌려 먼지라는 먼지는 다 빨아들여야 한다. 봉에 물걸레를 끼워 이번에는 닦을 차례다. 이 봉걸레가 참 애매한 게 무턱대고 힘을 주고 닦다 보면 봉의 손잡이가 휘어 나중에 접거나 길게 늘여 빼려 할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25년 동안 이미 세네 개쯤 봉을 부러뜨리고 말았으니 바짝 신경을 써서 닦아야 한다. 약하면서도 세게, 참 아슬아슬할 정도로 세게 닦아야 한다. 혹 눌어붙어 버린 얼룩은 힘을 쥐서 닦아야 하지만, 그때도 무식하게 힘만 주면 봉을 못 쓰게 된다. 그래도 안 지워지는 얼룩은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물티슈로 지워야 한다.


다 닦고 나서 창문을 닫으려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내 방 베란다에 널려 있는 흰 빨래가 보였다. 차곡차곡 걷어 하나하나씩 갠다. 땅바닥에는 내 나름대로 매긴 번호가 있다. 1번 자리엔 내 것, 2번은 아내, 3번은 아들, 그리고 4번은 딸이다. 순서대로 빨래가 있던 원래의 자리에 갖다 놓아야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옷을 찾느라 헤매는 일이 안 생긴다. 그래서 내가 매긴 그 번호를 혼동하면 안 된다. 간혹 그걸 헷갈려해서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마무리했다. 물론 할 만한 일을 찾으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일단 할 일은 다 했다.


당연히 기분이 좋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말이 이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것도 안 해놓고 내 볼 일을 보러 나가면 당연히 욕먹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렇게 알아서 해놓고 가면 우선 내가 마음이 편해진다.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이제부턴 내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예닐곱 시간쯤은 마음 놓고 글을 쓰고 책도 읽다가 돌아올 생각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장이 무게를 잃어가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