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게으름_ ep04
나는 NK다. NK? NK가 뭐냐고? North Korean? 틀렸다. 영어를 전공하지만 한국 토박이로 문법, 독해에는 능하나 말하기에는 소질이 1도 없는 정통 한국인을 뜻하는 Native Korean의 줄임 말이다. 대학시절, 우리 과에는 외국에서 살다온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과 함께 듣는 외국인 교수님 수업에서 NK들은 고군분투했으나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몇몇 친구들은 학사경고의 위험을 맞이했다.
‘이대론 안 되겠어.’
뭐라도 해야 했다. 아무리 영어 회화 학원을 다녀도 말하기 실력은 쉽게 늘지 않았고,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였다.
‘연수 다녀오면 영어 잘하게 될 테니 전공수업은 연수 다녀와서 듣지 뭐.’
어학연수가 마법처럼 내 영어 실력을 향상 시켜줄 것이라 믿으며, 기대에 부풀어 여러 프로그램을 찾아보던 중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보조교사 역할을 하며, 한국 문화에 대해 가르치는 인턴쉽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단순히 어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고, 그렇게 어학연수가 시작되었다.
“다종. 너 일본인이야?”
해맑은 영국의 초등학생들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 한국인이야.”
아이들은 솔직했다. 일본인임을 기대했는데 한국인이어서 실망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한국인임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오기 직전에 일본인 보조교사가 있었는데, 그녀가 일본 문화에 대해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가르쳐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질 수 없었다. 더 재미있는 한국 문화 콘텐츠로 아이들의 실망감을 호기심으로 바꾸어 놓아야 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전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단한 한국어 인사법을 가르칠 때는 일본어보다 발음하기 어렵다며 불평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녀는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느 날 열심히 한복 수업을 하는데, 말썽꾸러기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친구에게 한 말이 귀에 꽂혔다. 한국어로 쓰고 보니 꽤 공손해 보이지만 나를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게 만든 한 마디였다. 아무리 재미있는 콘텐츠를 준비해도 원어민 앞에서 내 영어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고, 아이들의 돌발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저 한마디가 내 귀에 맴돌았고, 나를 괴롭게 했다. 동료들도 대하기 어렵기는 매 한 가지였다. 본토 영국인 선생님으로 가득한 교무실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닌 듣기 평가라도 하듯 항상 귀를 쫑긋하고 있어야 하는 불편한 공간이었다. 왜 이런 프로그램을 선택한 것인지 나의 선택에 대해 무수한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그나마 홈스테이 가족이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 나에게 우호적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온전히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왔으리.
나의 하루는 아래층에서 솔솔 올라오는 티팟의 온기, 모락모락 토스트가 구워지는 냄새, 그리고 빵 한 조각을 두고 홈스테이 아이들이 투닥거리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눈을 반쯤 뜨고 내려가 갓 구운 식빵에 누텔라를 듬뿍 발라 홍차와 함께 목구멍으로 집어넣은 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홈스테이 가족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그러고는 8시 45분 학교 철문이 닫힘과 동시에 일과가 시작되었다. 유치원 격인 Nursery부터 Year 6 학급까지 차례로 돌아가며 하루 한 시간 씩 한국 문화 관련 수업을 진행하고, 나머지 시간은 Year 3 전담 보조교사로 수업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을 도와주거나, 수업 중 말썽을 일으키는 학생들을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
“그는 나에게 친절하지 않아!”
수업 중 선생님과 언쟁 끝에 분노에 찬 학생들을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하나 같이 하는 말이었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으니 선생님과 언쟁을 벌일 때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You are not nice to me!!” 하며 소리치는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꽤 흔했다. 교실 안의 선생님이 민망할 까 봐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사실 꽤나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선생님은 나만 싫어하네요!”에 해당하는 말인 듯했으나 주어가 You로 바뀌니 무섭게 들릴 수밖에.
분노에 가득 찬 아이를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Calm down. Calm down.” 가끔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으면 할 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Don’t cry. Don’t cry.” 속으로는 “야 인마! 너의 잘못은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해서 선생님이 화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한국에서 그렇게 행동했으면 너희 부모님 학교로 소환돼.”라고 백 번, 천 번은 말하고 있었지만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할 수는 없으니 그저 “워. 워. Calm down. Calm down.”
영국의 초등학교를 경험하며 놀랐던 것 중에 하나는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개인 교과서가 따로 없다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준비한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이 이루어졌고, 교실에는 보조교사가 한 명씩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 보조교사가 나였다.) 수학의 경우 교실 내에서 수준별로 학생들이 나뉘어 앉도록 한 후, 같은 개념을 배우되 연습 문제를 풀 때는 교실에 비치된 교과서를 가져가서 수준별로 정해진 문제를 풀도록 했다. 나는 주로 수준별 그룹에서 가장 도움이 많이 필요한 친구들과 함께 했는데, 곱하기를 배우는 시간에 한국에서 배운 방법대로 문제를 풀어 보이니 아이들은 나에게 수학 천재 아니냐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뼛속까지 문과 여자에게 수학 천재라는 칭호를 내리다니. 그도 그럴 것이 노래까지 만들어 구구단을 외우는 우리와는 달리 영국의 아이들은 곱하기를 할 때면 교실에 붙여진 구구단 표를 참고해서 문제를 풀곤 했다. 물론 시험을 볼 때에는 계산기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구구단을 줄줄 외우고 어려운 두 자리 곱셈까지 척척 해내는 내가 수학 천재가 아니면 누가 수학 천재였겠는가.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시험이 이루어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시험을 본 후, 문제를 다 푼 친구들은 자유롭게 운동장에 나가서 뛰어놀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딱히 시험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듯 보였다. 시험을 잘 본 학생들은 월반을 하기도 했는데, 한 학년 당 한 학급만 있는 규모의 학교였기 때문에 서로가 너무 잘 알기도 하고, 우리나라처럼 ‘언니’,‘오빠’의 호칭 없이 서로를 ‘You’라고 부르니 월반을 해도 나이나 호칭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놀랐던 것은 외국 이민자 자녀들을 위한 영어 수업이었다. 이민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기본적으로 영어가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수업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고 종종 소통의 문제로 남학생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영어 수업은 필수적인 듯 보였다.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함께 독서를 하며, 영어 읽기 훈련을 했는데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 수업을 따로 받고 싶을 정도였다.
보조교사로 아이들의 학습을 도와주며, 종이접기, 한복 입어보기, 한국 인사 배우기 등 한국 문화와 관련된 수업을 하며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점점 아이들도 내 수업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이 나를 보며 “안녕~~”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인턴쉽을 무사히 마치고 학교를 떠날 날이 다가오니 한편으로는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학교에서의 근무 마지막 날 극에 달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나를 위해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송별회를 준비해 준 것이었다. 전교 학생들이 만들어준 롤링페이퍼는 나를 울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과연 신사의 나라답게 그들은 멋지게 인사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영어 스펠링을 몰라서 옆에서 도와줘야 했던, 교복 팔 한쪽이 항상 올라가 있던 Year3의 Levi와 파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Year 1의 Elizabeth, 나보다 키가 커서 내 머리를 잡아당기곤 했던 Year5의 Nayasha가 생각날 때가 있다. 어쩌면 나를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삶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멀리서나마 응원을 보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