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게으름 ep_10
그 어느 해 보다도 전 세계가 뜨거웠던 2018년 여름. 어디로 떠날까를 고민하던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오스트리아에 끌렸다. 특별히 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독일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커피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비엔나커피를 즐겨 찾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의 오스트리아행에는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럼 체코도 가는 거지? 거기는 맥주가 물보다 싸! 코젤 다크 꼭 먹어야 하고, 야야! 부다페스트 가서 야경도 꼭 봐야 해.”
오스트리아에 간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자 동유럽에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오스트리아 사랑은 확고했다.
“아니, 나 오스트리아에서만 일주일 있을 거야. 힐링하면서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공연도 보고 미술관도 보고 그러다 올 거야. 왜냐하면 이번 여행의 테마는 힐링이거든!”
그랬다. 나의 오스트리아 여행의 테마는 첫째도 힐링, 둘째도 힐링이었다. 그래도 빈이 클림트의 도시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1일 1 미술관 방문이라는 고상한 계획을 세운 후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게으른 여행자 중 1 등답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내 사전에 유심을 한국에서 미리 준비하는 일은 없었다. 현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굳이 한국에서 시간 낭비를 하며 미리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잠깐의 시간 낭비가 여행지에서의 엄청난 시간 낭비를 막아 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유심 없이 빈에 도착한 나는 공항 와이파이에 의존하여 유심 파는 곳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하지만 그곳의 와이파이는 한국의 와이파이와는 달랐다. 겨우 연결되었다 싶으면 끊기기 일쑤였다. 그렇게 연결과 끊김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 어느 블로거의 ‘공항에서 사는 것보다 시내에 있는 A라는 브랜드에서 사는 편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A라는 브랜드 유심이 좋다고 했다) 공항에서 판매하는 유심은 뒤로 한 채 무작정 시내로 향했다.
“저 A 브랜드 유심을 사고 싶어요.”
빈 중앙역 관광안내소의 직원은 친절하게 우체국에 가면 내가 원하는 유심을 살 수 있다 안내해주었다.
‘우체국? 우체국에서 유심을 판다고? 이상한데….’
의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우체국을 향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우체국에서 A 브랜드 유심을 팔고 있었고, 직원에게 두어 차례 내가 찾는 유심이 맞는지를 확인한 후 샀다. 그리고 귀에 꽂고 있던 귀걸이를 빼 귀걸이 침으로 유심 단자를 열어 유심을 장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유심만 설치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만 같았다. 일단 숙소까지 가는 구글 맵을 이용할 수 있고, 맛난 음식점을 검색할 수도 있고, 주요 관광지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유심칩을 장착했으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다. 새하얀 로딩 페이지만 계속될 뿐이었다. 몇 번을 껐다. 켜도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우체국을 방문했다.
“이 유심이 작동하지 않아.”
“아, 그거 활성화되려면 30분이 필요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는 직원의 태도는 ‘야 이 참을성 없는 한국인아! 좀 기다리란 말이다!’라고 하는 듯했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당케 쉔”을 외친 후 잽싸게 우체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중앙역을 배회하며 30분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0분이 지나도 새하얀 사파리 창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에이, 좀 더 기다려 보지 뭐. 1시간은 있어 보자.’
그렇게 나는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대며 중앙역 근처를 배회했다. 하지만 여전히 꿈쩍 않는 인터넷 연결 창. 나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고 다시 우체국을 방문했다.
“음. 이건 너의 핸드폰 문제인 것 같아.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직원은 또다시 무심하게 대답했다.
“응? 그럼 나 이거 환불해 줘.”
“환불은 안 돼. 다시 말하지만, 이건 유심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핸드폰 문제야. 정 그렇다면 이 유심의 본사로 찾아가 봐. 주소를 적어줄게. 자. 여기.”
더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쓱싹쓱싹 종이에 주소를 적어 내 손에 쥐여주는 직원에게 달리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짧은 영어 탓이겠지.
그렇게 등 떠밀리듯 종이 한 장을 손에 꼭 쥔 채로 우체국을 나섰다. 다른 한 손에는 나 여행객 이오를 증명해주는 큰 캐리어와 함께. 이 대책 없는 여행자는 예약한 호텔의 주소조차도 따로 적어두지 않았으니 유심으로 구글 맵에 연결하기 전까지는 호텔을 찾아갈 수도 없었다.
‘아오. 구글 맵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스마트 폰 없이도 잘 보고, 잘 먹고, 잘 듣고, 잘 느끼고 아무 문제없이 여행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언제부터 내 여행은 스마트 폰에 이렇게 의존하게 되었을까. 스마트 폰 때문에 정작 나는 스마트함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내 발걸음은 유심 본사를 향하고 있었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은 나의 분노와 짜증을 돋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유심을 준비만 했더라면! 공항에서 미리 유심을 샀더라면! 무수한 가정법으로 내 머릿속은 가득했고, 나의 게으름에 대한 분노와 후회로 머릿속이 가득할 때쯤 유심을 파는 본사에 도착했다.
“활성화가 되어 있지 않네. 우체국에 유심을 사는 경우에는 전화해서 유심을 활성화시켜야 해.”
직원은 전화 한 통으로 유심을 활성화시켜 주었다.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일 때문에 이런 생고생을 했다니! 하지만 누구를 탓하리. 이 모든 것은 게으른 자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한국에서 미리 유심을 준비해 가거나, 유심에 대한 정보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뛰어나게 부지런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여행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여행 준비는 작게는 여행지에 대한 인상과 크게는 전체 여행을 좌우할 수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준비 없는 자의 게으른 여행은 첫째도 힐링, 둘째도 힐링이었던 빈 여행의 첫날을 시간 낭비와 체력 낭비로 가득 채우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구글 맵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는 이유로, 작은 유심 하나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리고 메일함을 뒤져 호텔 주소를 찾아 구글 맵에 입력한 후, 돌바닥에 닿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캐리어와 함께 비엔나 거리를 활보하며 지켜지지 않을 다짐을 되뇌었다.
‘다음번 여행 때는 꼭 유심을 미리 준비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