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_헬렌 필딩
'브리짓'은 영화로 처음 접했었다. 사실 원작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좋아하는 작가님이 자신은 유머를 책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고 배웠다는 말을 듣고 덜컥 읽고 싶었다. 이왕이면 재밌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역시나 이 책을 다 읽었다고 재밌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그냥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2001년의 브리짓과 2018년의 한 여자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이 책은 브리짓의 일기로 구성되었는데, 마치 친구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나는 브리짓과 달리 일기를 매일 쓸 정도로 성실하지 못하지만, 가끔 쓰는 일기에서조차 자신을 속일 때가 있다. 이렇게 타인이 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쓰는 기록들에는 굳이 담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게 당연할 수 있는데, 나 밖에 볼일 없는 일기장에도 애써 담지 않는 것들이 많은 것이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한다거나, 정리되지 않았는데 성급하게 정리한다거나.
특히 나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것들을 꼭꼭 감춘다. 스스로가 찌질해 보이는 것들은 밖으로 표출하여 기록할 용기가 안 난다. 물론
그렇게 무사히 지나가면 문제 될 게 없지만, 종종 나도 모르게 쌓여있던 곪은 것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폭발할 때가 있다.
그래서 브리짓의 일기가 좋았다. 내 일기에 반해 브리짓의 일기는 너무나 적나라했고, 자신의 찌질함을 아무 상관없이 쏟아부어놨다. 소설 속 가상의 인물에게 영향받는 게 웃기긴 하지만, 브리짓의 적나라함에 통쾌해하며, 나 역시도 적어도 내 일기장에서만큼은 괜찮은 사람인 척, 고상한 척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이런 말하기에는 너무 일기를 가끔 쓰긴 하지만.
브리짓의 이야기에 단순 로코물이라는 라벨만 붙일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브리짓과 브리짓의 친구들은 여성의 삶에 대해 여러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도 살면서 한 번쯤 하게 되는 질문들. 가령, 왜 꼭 결혼을 해야 할까. 싱글 여자라 불행한데, 또 결혼한 여자도 불행하다? 왜 피 흘리는 것은 결국 여자여야 할까. 여자가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안전하게 일을 하는 건 언제쯤 순탄해질까. 한 30대 독신 여성이 자신의 일기장에 다른 이(기혼여성, 남자 등)들 입장 고려하지 않고 필터링 없이 마구 던지는 질문들이다. 그 질문들 앞에 때때로 답답하기도 하고, 꼭 저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불편하기도 하다가, 또 충분히 공감도 된다.
단순히 환상의 짝꿍을 찾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난 아직까지 다행히도 행복한 기혼여성 1이다(사람들은 애 낳기 전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 말이 너무 싫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왕이면 빨리하라고 부채질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미뤄둔 임신, 출산, 육아, 그 와중에도 계속 이어가고 싶은 커리어의 숙제 앞에서 내가 여성으로서 자주 느끼는 답답함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브리짓의 투정들을 읽으며 내가 앞둔 이 시간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이 되어 마음이 묵직해졌다. 예성이에게 그 묵직함을 나누었다. 적어도 다행인 건, 나 혼자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아닌 건 같아서다. 남편도, 또 나와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들도 함께 애쓰고 있다. 여전히 해결책은 모르겠다. 잘 헤쳐나가볼 수밖에. 사랑으로. 껄껄. ('잘'이라니. '사랑'이라니. 이렇게 추상적일 수가.)
어쨌든 영화 뿐 아니라, 책으로 만난 브리짓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1년 동안 자신의 일기에 매일의 몸무게를 기록해 온 결과가 0.5kg 감량이지만, 수두룩했던 새해 결심 중 딱 하나 이루었지만, 아주 대단히 발전한 한 해라고 생각하는 그녀를 만나 좋았다. 조만간 다른 브리짓 소설들과 영화를 정주행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