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친구인 어떤 분이 내 SNS를 보고는 '다정이, 그 친구는 참 행복해 보이더라.'라고 말했다는 걸 전해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속 한구석에 울끈 힘이 들어갔다. '행복해 보인다.'라는 말은 좋은 말인데, 내가 느낀 이 경직의 정체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건 일종의 억울함이란 걸 깨달았다.
행복은 찰나의 순간으로 스쳐 지나간다. 난 그 순간을 기억하고자 해당 장면을 잘라내 기록하는 편이다. 볕 드는 시간이 지나가듯 행복의 순간이 지나가면 줄곧 그늘이 드리운다. 어둑해진 장면 안에서 아등바등하며 구질 구질 거리는 일상을 버틴다. 그런 어두움은 기록까지 하며 붙잡아두고 싶은 종류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상 깊지 않은 이상 최대한 열심히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내 삶에는 가려둔 곳에서 홀로 감당하고 있는 행복 반대되는 것이 이따만큼 있는데, 그런 내가 행복하게만 보인다는 게 억울했던 거다.
어이가 없고 우스운 일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 심지어 나를 잘 아는 사람도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가 SNS뿐일 때가 많다. SNS에 좋은 것만 감쪽같이 편집해서 올리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억울함인가. 도대체 내가 뭘 바라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가 숨겨 둔 이면까지도 깊게 알아봐 주길 바라는 것인가.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
이렇다 보니 내 멋대로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하려니 해버린다.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은 그대로 흡수하는데, "괜찮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한 번 더 의심한다. 괜찮아 보여도 사실은 괜찮지 않을 수 있으니까. 사연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마음은 가려져있던 저마다의 고충을 경청하도록 만들고, 때때로 정말 괜찮은 사람이 진짜로 괜찮다는 데도 꿋꿋이 왜곡해서 보게 만든다. 경험상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단히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많긴 했다. 사람이 자기 경험을 맹신하기 시작하면 꼰대가 된다니까 경계해야 되긴 하겠지만.
내가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억울함은 꾸준히 날 헤집어놨다. 결국에는 꽁하니 질문을 기다리는 사람이 돼버렸다. 보이는 평면의 모습 말고 보이지 않는 입체적인 나를 궁금해하는 질문을 말이다. 누구라도 다가와 “그래서 요즘 너의 진짜 마음이 어때?”라고 물어주길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사실 내 주변에는 “나 요즘 마음이 이래.”라고 말하면 온 맘과 귀로 내 이야기에 집중해 줄 사람들이 선명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입도 꾹 다문 채 질문들이 내게 먼저 다가와 내 닫힌 입을 손수 열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이럴 때일수록 누가 짠 듯이 고요할 뿐이다. 그 정적 속에서 꼬일 대로 꼬여버렸고, 알아주길 바라는 어린 마음이 내 일상을 휘저어놨다.
이쯤 되니 내 상태가 정상은 아니구나 싶었다. 알아주지 않는 마음들은 텅 빈 구멍을 남겼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부산히 움직였으나 효과는 짧았다. 그 어떤 관계도, 성취도, 지식도, 소비도 충분치 않았다. 갈증이 날 때 소금물을 퍼먹는 격이었다. 웃긴 것은, 드디어 기다리던 질문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다시 목말라졌다는 거다. 날 온전히 이해해하려는 진심이 담긴 질문에 어버버거렸다. 막상 멍석이 깔리니 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이유가 많았던 거다. 이야기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이상하고 예민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내 어두움으로 상대방마저 어둡게 만들까 봐 등 각종 이유가 날 또 괜찮아 보이는 척하게 만들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겐 나의 단면만 보이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날 360도로 알아주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싶어 괜히 외로웠다.
오래 곪은 고민을 엄마에게 털어놓는 편이라, 이번에도 엄마에게 '이 지구에 날 온전하게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이번에도 명언을 날렸다.
"널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평생 없을 거야."
그 말에 힘이 빠지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아, 맞다. 사람은 기대하는 대상이 아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었지. 또다시 잊고 말았다.
텅 빈 곳을 채워줄 분은 딱 한 분 있다. 그분 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절대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내가 주는 물은 그에게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될 것이다(요 4:14)." 결국 내 모든 문제에 대한 결론은 늘 하나님이다. "또 하나님이야?"라는 이야기가 나와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또 하나님"이 맞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겐 어떤 답이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답이 없는 상태라면 어떻게 그 상태를 견디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하여튼 이 단순하고 유일한 답을 두고 매번 이렇게 헤맨다. 결국 매번 같은 결론이 나오는 반복학습이 큰 소용이 없고, 매번 성실히도 잊는다. 이 성실함 다른 데 써먹고 싶다.
건방지게도 리뷰를 하자면, 요즘 저분 좀 의지하고 있는데 확실히 효과가 좋다. 뻥 뚫렸던 구멍이 맑은 샘물로 채워진 것 같다.
이제 누군가가 '걔는 참 행복해 보이더라.'라고 이야기한다면, 억울해하기보다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해 보이는 것”이 여전히 오해일 수 있겠지만, 뚜렷하게 스친 행복한 순간들을 새삼 소중히 대할 수 있길 바란다. 아니 그보다는, ‘어떠해 보인다’는 모든 종류의 말에 이리도 유난스런 반응 없이 잔잔히 웃어넘기는 넉넉함이 있길 바란다. 내 구멍을 가득 채운 넉넉한 샘물로 다른 이들의 구멍을 채우는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제 막 구멍 메운 주제에 과욕 부리는 건가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