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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히 Jul 29. 2020

이 또한 지나간다

애 낳은 날에 대한 기록_양수누수/자연분만/유도분만


생명의 시작인 '출생'과 그 끝인 '죽음'. 사람이 살면서 겪는 수많은 일의 중요도를 무게로 단다면 이 두 가지가 제일 묵직할 것만 같다. 한 명의 사람이 감당하기에 버겁도록 커다란 일일 수 있는데,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직간접적으로 예외 없이 겪는다. 묵직한 무게에 압도되어 나는 진짜 못하겠다가도 모두가 겪는다는 사실이 결국 나도 겪어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같다. 모두가 겪기 때문에 유독 더 진심을 더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다. 반면에 다들 겪는 일인데 내가 겪은 일이 특별한 것 마냥 혼자 유난 떨기가 쑥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난 이렇게 기록하며 유난을 좀 떨어보련다.



5개월 전에 출산을 경험했다. 출산에 있어서 직접적인 경험을 한 것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내가 직접 태어날 때였는데 아쉽게도(다행히도) 기억이 나진 않고, 이번 두 번째 경험은 나로부터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경험이었다. 다른 사람을 낳는 경험은 내 평생 가장 강렬했고, 기억을 떠올리려니 아직도 잊지 못한 고통에 소름이 끼쳐 부르르 떨린다. 굳이 유난 떨기 겸연쩍고, 떠올리면 소름까지 끼치면서도 굳이 기록하겠다니, 나도 날 못 말린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출산 과정을 자세히는 못 쓰겠고, 최대한 대충 써보려 한다.




사는 곳은 김천인데 출산은 친정인 인천에서 하게 돼서 예정일 3주 전쯤 미리 친정집에 올라갔다. 친정에 올라가기 전에 애 나올까 봐 벌벌 떨었건만, 쓸 데 없는 '벌벌벌' 이었다. ‘얼른 나와라’ 주문을 걸며 무한 짐볼 통통과 풀파워 계단 오르기에도 불구하고 결이(태명)는 예정일 꽉 채우고 2일 지나도 깜깜무소식이었다.



그 대신 예상치 못한 소식을 받았다. 출산 직전 막달 검사에서 심전도 이상 소견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심장과 비교했을 때, 내 심장은 맥박이 엉뚱한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고, 그 맥박의 세기도 약하다는 것이었다. 배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만으로도 거추장스러운데 24시간 심전도 측정 기계를 찼고, 정밀 심장 초음파 검사도 받았다. 당장 애 낳는 것도 무서운 와중에 심장이 이상하다는 말을 들으니 불안에 불안이 더해졌다. 이제 와서 멘탈이 무너진다고 나아질 것은 없어서 최대한 담담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결과는 밍숭맹숭했다. 내 심장이 이상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현재 생명이 위독한 것도 아니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내가 특이한 심장을 가진 여자였다는 것만 발견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어차피 겪어야 할 것 차라리 빨리 겪고 싶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답답했다. 고통(가진통, 배뭉침)이 느껴지면 눈을 반짝이며 반가워하는 지경이었다. 내 생애 가장 괴로울 육체적 고통을 무척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가 웃펐다. 언제 진통이 올지 모른다는 핑계로 매 식사는 마지막 만찬이었다. 예정일이 2일 지난 2020년 2월 18일, 예약한 병원 진료를 앞두고 혹시 이게 마지막 만찬일지도 모르니 점심으로 고기로 거하게 먹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윽 소리가 절로 난다는 첫 내진을 했고, 양수가 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된 이상 감염의 위험이 있어 입원을 해야 하고, 자연 진통을 기다려보다가 태아와 산모의 건강을 위해서 다음 날 안에는 무조건 출산해야 하기에 유도 분만과 제왕절개 모두를 염두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사태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는 모르겠고, 이제 내일이면 드디어 지긋지긋한 임신이 끝이라니 반가웠다. 뭣도 모르고 설레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분만대기실에서 입원 준비를 하고 항생제를 투여하자마자 부작용으로 기껏 먹은 마지막 만찬을 다 토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병원에 입원했다는 게 실감 났고, 어차피 다 토할 거 마지막 만찬을 열심히 챙긴 것에 대한 허망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다행히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엄마가 주변 식당에서 갈비탕을 포장해 왔다. 점점 긴장이 돼서 무슨 맛인지 모르고 약 먹듯이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김천에서 부랴부랴 출발한 예성이가 도착했고, 엄마와 바통터치를 했다. 한창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라서 보호자가 1명만 함께할 수 있었다.


우선 자연 진통을 기다려보다가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진행이 되지 않으면 유도 분만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원한 날 저녁 6시경부터 주기적인 진통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곧 아기가 나오는 건가 싶어 희망을 가졌으나, 쓸 데 없는 희망이었다. 다만 새벽에도 진행된 주기적인 진통과 내진으로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 던져져 파도를 온몸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아무리 늦는 한이 있더라도 내일이면 다 지나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조금이라도 자자 싶어 눈을 감으면 앞으로 내게 펼쳐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선명해졌다. 결국 다른 사람들 분만 후기를 보며 불안함을 달래다(키우다?) 꼴딱 밤을 새웠고, 아침까지도 자궁문이 별로 열리지 않아 아침 7시부터 유도 분만제를 맞았다. 배는 점점 더 많이, 자주 아파오긴 했으나 간호사님께 예의 바르게 '감사합니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주치의 선생님의 회진 때 '감사합니다'라고 했더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니, 아직 멀었네요.' 하고 나가셨다. 아득해지는 말이었다.


나보다 늦게 분만대기실에 들어온 산모들이 나보다 먼저 분만실로 이동하더니 그들의 아기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그렇게 세 명 정도가 나를 추월했다. 애 낳을 때마저도 남들의 속도와 내 속도를 비교하며 조급해졌다. 그때도 '괜찮아. 아무리 늦어도 오늘 밤이면 어떻게든 다 지나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위안했다.


내가 시킨 거 아닌데(그럴 정신없음) 예성이가 스스로 찍어둔 기록. 이다정 남편 5년이면 이 정도는 기본.


촉진제를 맞은 지 5시간 정도 지난 오후 12시부터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안 나올 정도의 고통이 시작됐다. 주기가 점점 짧아져서 거의 1분~2분 주기로 온몸이 비틀리고,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고통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7시간 넘게 1~2분 주기의 진통이 계속됐다. 할 수 있는 건 예성이의 손을 붙들고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을 새웠으니 너무 졸리고, 밥도 물도 못 먹어 너무 배고팠다. 나와 같이 밥을 못 먹던 예성이는 나 배려하겠다고 몰래 편의점에서 사온 마들렌 먹다가 나한테 딱 걸리고 말았다. 예성이가 얼마나 배고플지 머리로는 이해가 됐는데 괜히 좀 얄미웠고, 사실 얄미움보다는 그 마들렌을 먹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기나긴 진통 중에 뱃속 아기의 BPM(심장박동 수)이 2번이나 떨어져서 촉진제를 중간중간 중단해야 했다. 아기의 심장박동 수가 내려갈 때 황급히 움직이는 간호사들을 보며 무서웠다. 나만 힘든 게 아니고 아기도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는 게 와닿았다.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아가가 많이 힘들어해서, 한 번 더 BPM이 떨어지면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이 개고생을 했는데 결국 수술이라니 잠깐 허망했다가, 그마저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이 고통이 끝났으면 싶었다.


물론 나도 무통 천국을 경험했다. 딱 1시간 정도였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말이다. 무통 효과로 진통이 약해지자 못 잤던 잠이 쏟아져내렸는데 절대 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기의 심장 박동 수가 약해서 내가 산소호흡기를 끼고 심호흡을 크게 해 계속 아기에게 산소를 넣어줘야만 했다. 그래서 잠들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가며 심호흡을 이어갔다.


간호사님들이 자기들끼리 아기 기록을 보면서 아기 사이즈가 나오기 괜찮다고 얘기하는 게 들렸다. 내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간호사님들의 말이다 보니 온몸이 지친 와중에도 촉수를 곤두세우고 엿들었다. "그런데 BPD가 조금 큰데.." "그러게. BPD가 좀.." BPD가 도대체 뭔지 몰랐지만 직감은 머리둘레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내 직감이 대충 맞았다(BPD는 머리 직경). 나는 어렸을 때 머리가 커서 자꾸 넘어지는 소녀였고, 예성이는 지금도 머리가 크니 놀랄 일도 아니다.


저녁 7시부터는 힘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 별명이 마징가를 오마주한 다징가일 정도로 힘이 센 편이라 힘주기에 대한 의문의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바로 바사삭 부스러졌다. 밤을 꼴딱 새우고, 26시간 넘게 아무것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진통에 치었으니 남은 힘이 별로 없었다. 간호사님들이 내 위에서 배를 누르며 애쓰다가, 내가 너무 힘이 없어서 오히려 위험하다고 더 이상 누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힘이 약하다는 말 들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내 손톱, 발톱의 힘까지 다 끌어다 힘을 주는데 안되니 울고 싶었다. 그 와중에 진통은 쉴 새 없이 몰아치니 미칠 것 같았다. 진짜 다 포기하고 그만하고 싶어 '못 하겠다'라는 말이 앞니 바로 앞까지 나갔다가 참았다. 내 몸속 작은 아기는 심장박동 수가 느려질 정도로 힘들어도 나오겠다고 애쓰는 중에 내가 못하겠다고 하는 건 왠지 의리 없는 것 같아서(이와 중에 의리)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은 못 한 거다. 혈관 터진다고 얼굴로 힘주지 말라고 했는데, 얼굴로라도 힘을 안 주면 정말 짜낼 힘이 없어서 얼굴을 버릴 각오를 하고 온 몸에 있는 힘을 다 짜냈다. 힘 한번 주면 정신을 잃어서 간호사님이 내 귀에 대고 계속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며 날 흔드셨다. 죽을 것 같이 아파오면 첫 번째 힘을 주고, 하나 둘 셋 심호흡한 뒤 바로 두 번째 힘을 줘야 한다는데, 첫 번째 힘주고 나서 계속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 억지로 깨면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싶어 눈물이 나는데, 울고 있을 새도 없이 다음 진통이 몰아쳤다. 진통-힘-정신 잃음, 다시 진통-힘-정신 잃음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는 '오늘 안에는 끝날 거야.'라는 생각으로 버텼으나, 이때는 이 고통이 영원할 것만 같아 이렇게 죽나 싶었다.


분만대기실에 있을 때 분만실에서 흘러나오는 산모들의 절규를 들으며 난 쑥스러우니 소리 안 지르겠지 했다. 그런데 예성이가 나 소리 많이 질렀다고 한다. 기억이 잘 안 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은 공평히 흐르긴 했고, 어느 순간 '거의 끝났다'라는 반가운 말이 들렸다. 침대가 트랜스포머로 변했고,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 주치의 여선생님은 퇴근하신 시간이라 당직이셨던 남자 선생님이 오셨다. 남자 선생님한테 산부인과 진료 못 받겠다고 할 때 선배 엄마들이 그 상황 되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남자든 여자든 빨리 나 좀 살려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몇 번 더 죽을 것 같은 힘 주기를 반복했고, 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배 위에 뜨뜻한 게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뭔가 싶었는데 내 뱃속에 있던 그 애였다. 애가 몸에서 빠져나오는 시원한 느낌이 있다던데, 난 그 순간 정신을 잃어 알지 못한다. 2020년 2월 19일, 저녁 8시 32분, 약 26시간의 진통 끝에 3.12kg 결이가 태어났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분주히 후처치가 진행됐다. 아프긴 했으나 애 낳는 거보다 낫다 싶어 다 참을만했다. 천장을 보며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진짜 끝났다. '라는 말만 계속 입안에서 굴렸던 거 같다. 그 사이 예성이가 들어와 탯줄을 자르고, 간호사분들이 결이를 내 품에 안겨 줬다.


결이의 울음소리는 약했고, 처음 본 얼굴이 잔뜩 부은 채 맥아리가 없었다. "고생했어. 근데 넌 누구를 닮은 거니?"라는 말로 결이에게 첫인사를 했다. 병원 행정 처리를 하고 돌아온 예성이를 보니 서러움이 터져 또 눈물이 났다. 예성이도 글썽이며 내게 "고생했어."라 했다. 우리 셋 모두 고생한 시간이었다.



분만한 병실에서 입원실로 옮기기 전에 예성이와 나, 결이 이렇게 셋이서 시간을 잠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 가슴에 아가가 올려져 나와 결이의 피부가 처음 맞대어졌다. 작고 말랑했다. 임신했을 때 많이 들은 '요게벳의 노래'를 틀어놓고 예성이가 감사 기도를 해 주었다. 우리 셋의 첫 가족 예배였다. 그 평온한 순간 안에서 내가 진짜 아기를 낳았고, 임신과 출산이 드디어 끝났다는 걸 제대로 실감했다. 예성이는 출산 선물로 준비한 목걸이와 편지를 주었고, 이 끝을 진심 다해 기념해 주는 예성이에게 고마웠다.


아가는 신생아실로 가고, 난 입원실로 이동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었고, 얼굴과 눈의 혈관이 터져서 거뭇거뭇 한 작은 반점들이 조금씩 진해지고 있었다. 내 평생의 얼굴 중에 제일 추했다.


입원실에 도착하자마자 간호사님께 뭐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고, 그래도 된다고 했다. 너무 배고프고 졸렸다. 미역국을 먹어도 좋았겠지만 병실에 돌아오니 병원식이 끝난 시간이었다. 난 다 필요 없고 아까 예성이가 나 몰래 먹다가 걸린 마들렌만 먹고 싶었다. 예성이는 자기가 밖에서 미역국을 사 오겠다고 했지만, 난 마들렌만 찾았다. 예성이는 가방 속에서 먹다 만 마들렌 봉지를 쭈뼛쭈뼛 꺼냈다. 그래서 애 낳고 공복 26시간 만에 처음 먹은 음식은 그 퍽퍽한 마들렌이었다. 누워서 눈도 못 뜨고 마들렌을 우걱우걱 먹었다. 황홀할 정도로 맛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아빠 목소리 듣자마자 서러움에 복받쳐 또 눈물이 났다. 아이처럼 엉엉 울며 '나 너무 아팠어 엉엉. 둘째는 없어. 엉엉' 했다. 하루 종일 맘졸인 엄마 아빠도 같이 울면서 둘째는 낳지 말라고 했다. 분명히 그때 그랬는데, 요즘 슬슬 둘째 얘기를 하신다. 곤란하다. 시어머님과 형님과도 통화했는데 내 목소리 듣자마자 우셨다. 이 고통을 겪어본 여자들은 같이 눈물을 흘려준다는 걸 경험했다.


대략만 기록하려고 했던 게 결국 이렇게 길어졌다. 역시 출산 얘기는 밤을 새우며 할 수 있다는 말이 맞나 보다.




출산의 폭풍이 날 통과하고 나니, 고요해진 바다 위에 한 문장이 동동 떠 있었다. 그건 '이 또한 지나간다'였다.


'지나간다.'는 말로 버틴 26시간이었다.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아 아득해져 울며불며 헐떡였는데도 끝은 반드시 있었다. TV에서 25년 결혼생활을 한 부부가, 은혼식을 기념하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문장을 새긴 반지를 나눠낀 것을 봤었다. 그때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무게감과 깊이를 어렴풋이 공감했는데, 임신과 출산을 겪고 나니 많이도 들어 본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내 세포 하나하나에 밀도 높게 스며들었다.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고 지치는 일도 결국엔 지나갈 일이기 때문에 견딜 힘이 난다. 꿈인가 생시인가 모를 정도의 행복도 결국엔 지나갈 일이기 때문에 지나친 도취와 자만 없이 겸손히 겪는다. 지루할 법한 평범한 오늘도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좀 더 특별하고 감사히 보낸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이 이를 기억하는 자들에게 주는 선물들이다. 매 순간 이러긴 쉽지 않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주는 선물을 내 삶 속에서 조금 더 많이 누리는 요즘이다.


임신도 출산도 지나갔고 이제는 육아다. 혹자는 배 안에 있을 때가 좋을 때라고 할 만큼(하지만 난 임신보다는 육아가 훨씬 낫다.) 육아의 여정도 만만치 않은 고통이 함께한다. 5개월 정도 육아를 해보니 내 모든 육체와 정신의 에너지를 한 톨 남김없이 쫙 쫙 모아 완전히 갈아서 아이의 거름이 되는 기분이다. '희생'이라는 단어 아니면 설명이 안되는 일상인데, 그게 참 어색하다.


흔하디흔한 '어머니의 희생' 같은 서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엄마가 된다면 희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엄마의 역할과 자신의 삶까지 놓치지 않고 잘 살아낸 나의 엄마를 보며 엄마가 날 위해 희생했다고 느낀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난 그 점이 좋았다. 내가 엄마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키우며 깨달은 건 엄마가 날 위해 희생한 시간이 분명히 있었는데, 티를 안 냈다는 거였다. 모든 엄마는 짧든 길든 희생을 경험한다. 희생의 시간을 보내며 때때로 무너질 듯 지치는 때가 오면 '진짜 못하겠다.'라는 단어가 턱 끝까지 차오른다. 그때 '이 또한 지나간다'라는 문장을 삼키면 약기운이 돌 듯 좀 더 버틸 힘이 난다.




안으라고 난리 치는 이 8kg 짜리 사람을 온몸 부들거리며 이 악물고 안고 있을 때 하는 상상이 있다. 무려 이든이(전 '결이', 현 '정이든')의 결혼식 날을 상상한다. 벌써부터 아들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것 아니냐며 말리는 주변사람들이 있으나 나는 그냥 벌써부터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내게 있어 떠나보낼 준비는 정을 떼는 준비가 아니라 되돌려 받을 기대를 버리고 그저 주기만 해도 좋은 사랑을 할 준비이다. 동시에 ‘지나간다’를 극약처방 하는 것이다.


부모는 배를 만드는 조선공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튼튼하고 성능이 좋은 배를 만들듯 자식의 몸과 마음을 건강히 세우고, 필요한 능력의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그렇게 배가 완성되면, 배의 존재 목적은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품 안에 있던 자식을 넓은 바다로 떠나보내야 한다. 내 아이가 결혼을 하게 될지는 모르는 것이지만, 부모를 떠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이 결혼이기에 이든이의 결혼식 날을 상상해본다. 나를 다 갈아 넣어 사력을 다해 키운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거 같다. 어느덧 자라 튼튼한 배가 된 아들을 보며 감사하겠지만, 아무리 지금부터 준비를 미리미리 했더라도 꼭 붙어있던 존재를 분리하는 일이 마음 찢어질 일이겠지 싶다. 그렇게 혼자 맴찢하며 결혼식 날의 이든이 뒷모습을 그려보는 중에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아들과 함께하는 과거의 하루로 딱 한 번 돌아갈 수 있는 찬스를 주었다는 상상까지 한다. 그리고 나는 돌아갈 날로 오늘을 선택한다.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작은 아가였던, 자신의 눈동자로 다른 무엇도 아닌 엄마를 쳐다보는 시간이 가장 길었던, 내 품에 포옥 안겨 새근새근 잠든 우리 아들과의 평범한 하루인 오늘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무거운 정이든을 안고 있는 시간이 괜히 살짝 더 애틋하고 소중해진다(물론 너무 힘들 땐 그마저도 안 먹히지만).


이든이와 함께 하는 하루에는 미칠 듯 지쳐 흘러나오는 눈물, 날아갈 듯 행복해져 짓는 미소, 매일 반복되는 듯한 지겨운 한숨이 골고루 섞여있는데, 결국 이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기반으로 한 약간의 상상이 나의 복잡히 얼룩진 하루를 맑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수없이 지나 보낸 것들 위에서 지금 이 순간도 지나가고 있다. 며칠째 장맛비가 내리고 있으나, 이 흐리고 축축한 날도 결국 지나가고 바삭거리는 햇볕이 내리쬘 것이 분명하다. 내 삶도 그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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