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레이션 바깥에 서서

#6 흐릿해질수록 선명해지는 것

by 호우





6화. 흐릿해질수록 선명해지는 것



원래 시력이 좋지 않아 중학생 때부터 안경을 끼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멀리 있는 것도 잘 보이지 않고,

가까운 것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 미간은 요즘 하루 종일 긴급근무 중이다.

고생이 많다, 미간아.


문제를 더 키운 건 글자였다.

책을 펼치면 활자들이 각자 자기 주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밀치고 부딪히며 흐릿해진다.

작가들은 흔히 활자중독이니 뭐니 말하길래

나도 그 부류인가 했더니...

아니다.

나는 그냥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사람 쪽이었다.


문자들이 성냥갑 안에 꽉 찬 것처럼 느껴질 때면

페이지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조용한 의심이 고개를 든다.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 뭔가 부족한 건 아닐까.’


그래서 다독을 잘 못했다.

눈은 점점 피로해지고, 시야는 흐릿해졌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이 들어서야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자,

보이지 않는 눈으로 책장을 더 자주 넘기고,

비벼도 개운하지 않은 눈으로

노트에 무언가를 계속 적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알았다.

지금 흐릿해지고 있는 건 시력이 아니라

이전까지 내가 세상을 보던 방식이라는 걸.


눈의 해상도는 낮아졌지만,

의식의 초점은 오히려 안쪽으로 이동했다.

바깥의 문자들은 흐려졌지만,

그동안 지나쳐왔던 생각과 감각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해졌다.


흐릿해지는 눈으로

더 선명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간.

지금 내가 쓰는 글은

시력이 아니라 의식의 위치가 바뀐 자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