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는 선택

-N.H. 클라인바움, '죽은 시인의 사회'

by 이여름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지금"

피츠의 낭독이 끝나자 키팅 선생은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읊었다.

"이 같은 감정을 라틴어로 '카르페디엠'이라 한다. 그 뜻을 아는 사람?"

(중략)

"'오늘을 즐겨라'입니다."

-N.H. 클라인바움, '죽은 시인의 사회'


"선생님. 오늘 늦었습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요. 다음에도 10분 정도 늦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 학기. 현재를 사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학생들에게 알려줬다. 당돌하게도 내 가르침을 받들어, 좋은 날씨를 즐기는 학생이 두 명 생겼다. 퍼뜩 생각이 났다.

'다른 아이들도 날씨 탓으로 수업에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하다,

'내 수업을 놓치는 것도 현재를 포기하는 것이지 않겠니.' 떠올리곤

입으로는 "그랬구나. 잘했다."라고 멋쩍게 말했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의 호흡을 느끼는 것, 평화를 찾는 것이겠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내일이 없을 것처럼 자신을 망가뜨리는 행위로 오인해선 안 된다. 대학 때 선배들에게 배운 것도 카르페디엠이다. 내일 강의를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술 마시는 데에 집중하라는 가르침. 난 선배들의 카르페디엠 철학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겉돌며 도서관엘 갔었다. 그곳에서 오히려 삶의 평화와 행복감을 느꼈던 터였다. 그러니 카르페디엠은 사치와 향락과는 다른 말이다.

카르페디엠은 현재에 무엇을 즐기느냐에 대한 물음이 정립되고서야 가능하다. '무엇'을 떠올리려면 '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현재를 즐긴다는 것은 나의 잠재력을 알고, 나의 재능을 찾는 과정이다. 로저스가 말하는 자아실현의 과정이 카르페디엠이다. 대학 시절, 나에게 도서관은 지적 쾌락을 선물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을 읽으며 시스템의 잔인함을 깨달았고, '죽음의 수용소(빅터 프랭클)'를 읽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겼으며,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를 읽으며 도덕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다. 끊임없는 나와의 대화, 현재와의 호흡이 지금을 견인한 것이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카르페디엠의 선행이다. '적절한 시기'에 '무엇'을 '왜'해야 하는지 알고 행동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현재에 즐길 수 있는 것은 즐비하다. '내 수업'과 '오늘의 날씨', '친구들과의 만남', '게임', '노래' 등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현재를 즐긴다는 것은 또 하나의 현재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선택의 몫이다.

책만 택했던 나는, '사람'을 선택하라고 하고 싶다. 그 시기에 딸 수 있는 꽃봉오리는 뭘까? 관계 맺음이다. 내 친구들을 보면 그걸 많이 느낀다. '내 성향이 그래서'라는 무적의 논리도, 친구 관계에 소홀했던 나의 과거를 뒷받침하기엔 허술해 보인다. 서로 웃고, 싸우고, 화해하고, 놀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사랑하고, 믿고, 배신당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위로하는 그 모든 감정들을 학생들이 온전히 선택하기를 바란다. 지금이 관계를 맛보는 가장 달콤한 시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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